2010년 9월의 독립운동가(권준 [1895~1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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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0-09-01작성자 부산지부조회수 3,956 |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의열단 결성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자금 조달과 의열투쟁을 지원하였으며,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장교로 항일전쟁에 참여, 임시정부 내무부 차장으로 교민사회 보호를 위해 힘쓴 권준 선생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선생은 경북 상주군 함창면 척동리 168번지에서 태어났다. 1917년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한 후 광복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1919년 만주로 망명 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독립운동가로서의 자질을 연마했다. 1919년, 일제의 무단통치가 극에 달하였고, 거국적인 만세시위가 진압되자 독립운동의 방략에 있어서 보다 강력한 수단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선생은 동년 11월 9일 중국 지린성에서 김원봉 윤세주 등과 함께 의열단을 결성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의열단의 활동 자금을 관리하는 중책을 맡아 부산경찰서 폭파사건,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등의 의열투쟁을 지원하였다.1924년 1월 광저우에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제1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었다.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이라는 이질적인 두 세력이 단결합작하는 것을 목격한 선생은 민족 전체 역량의 총동원을 통한 민중 직접 혁명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선도할 정치군사 간부로서의 능력을 갖추기 위해 1926년 3월 8일 황포군관학교 제4기생으로 입교하였으며 동년 10월 졸업 후 국민혁명군 장교로 임관,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의 교관으로 배속되어 군사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유악청년회 비서로 서무부를 관장하며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협동전선운동을 추진해 나갔다.1932년 초 의열단 지도부는 한중 항일연합전선을 결성하기로 하고, 중국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의 승인을 얻어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 학교를 설립하였다. 1935년까지 125명의 졸업생을 낸 이 학교는 한국인만을 위한 군사학교였다. 선생은 교관으로서 축성학을 가르치며 독립운동 인재 양성에 혼신을 다하였다. 1933년 선생은 중국군으로 복귀하여 중국군 장교로서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였고, 중국군에 복무하면서도 부단히 한인독립운동진영과의 연계와 참여를 시도하여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이후 1944년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여 내무부 차장으로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이했다.해방 후 무한지역 교포선무단 단장과 광복군 5지대장으로 동포의 생명과 재산 보호에 진력하다가 1946년 12월 귀국하여 1959년10월 27일 충남 대덕 유성면 구암리에서 향년 65세로 별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