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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이달의 독립운동가』선정 발표
작성일 2005-11-22작성자 관리자조회수 683

◈ 언론을 통해 애국계몽활동을 전개한 장지연(1864~1920)선생
◈ 을사조약 강제체결 직후 「시일야방성대곡」을 황성신문에
게재하여 항일독립의식 고취

국가보훈처는 2004년도 11월『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을사조약 강제체결 직후 「시일야방송대곡」을 황성신문에 게재하는 등 언론을 통해 애국계몽활동을 전개한 장지연 선생을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선정 발표했다.

선생은 1864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조선시대 예학의 대가인 장현광의 12대 후손으로 어려서 장석봉에게 유학을 공부하였고, 이후에는 의병장으로 이름 높은 허위의 형인 허훈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94년 초시에 합격한 뒤 1896년 상경한 선생은 새로운 인물들과 만남을 통해 사상적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특히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그리고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경험하면서 국가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해결방안을 찾기 위해 성호학파계열의 실학과 자신의 사상을 접목시킨 진보적인 개화사상가이자 개신유학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98년 황성신문의 창간에 참여하고, 1899년 시사총보의 주필로 계몽적 언론인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선생의 언론을 통한 애국계몽활동은 1902년 황성신문 주필 겸 사장으로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1905년 11월 일제의 을사조약 강제 체결을 통렬하게 비판하여 민족의 독립정신을 촉발한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표출되었다. 이 논설로 인하여 선생은 일제 헌병대에 피체되어 4개월 간의 고초를 겪었지만, 선생의 독립의지는 결코 꺾이지 않았다.

일제의 압력으로 황성신문 사장을 사임한 뒤에도 1906년 국권회복운동 단체인 대한자강회의 창립과 1907년 국채보상운동 등을 주도하였으며, 우리의 강역과 역사를 다룬 고전들을 발간하고, 몸소 역사 연구를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정신을 배양하며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 갔다.

이같이 일제로부터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선생의 노력은 경술국치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시대적 격변과 망국의 비운을 체험하면서 울분에 쌓여 병을 얻었던 선생은 1920년 11월 1일(음력 10월 2일), 마산 자택에서 57세를 일기로 운명 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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