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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독립운동가 박차정 선생
작성일 2006-06-02작성자 관리자조회수 237

◈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와 노동운동 주도 ◈
◈ 의열단원,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으로 확약◈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박차정 (1910.5~1944.5.27)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박차정 선생은 1910년 경남 동래에서 태어나 민족교육의 전통이 강했던 일신여학교 재학 중 민족운동에 투신하여 조선소녀동맹 동래지부에서 활동하였고, 동래청년동맹의 집행위원을 맡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7년 근우회 동래지회 결성에 참여하고, 민족독립에 관한 글을 발표하여 독립의지를 표출하여 갔다.

1929년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선전조직과 출판부문을 담당하였고, 1930년 1월 서울의 11개 여자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를 배후에서 지원한 것으로 밝혀져 시위 직후 피체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선생은 1930년 중국 북경으로 망명한 뒤 의열단에 가입하고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레닌주의정치학교의 운영에도 참여하였고, 1931년 김원봉과 결혼하였다. 1932년 남경으로 옮긴 뒤에도 김원봉을 도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개설을 준비하였고, 개교 후에는 여자부 교관으로 교양교육과 훈련을 담당하였다.

1935년 남경에서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그 지원단체로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고, 여성들을 민족독립운동으로 끌어들였다. 나아가 1937년 좌익 민족운동세력의 결집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 창설에 동참하였고, 그 산하 무력으로 1938년 한구에서 결성된 조선의용대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을 맡아 항일투쟁에 진력하던 중, 1939년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였다.

중경으로 옮긴 뒤 1942년 임시정부는 민족혁명당과 좌우합작을 이루었고, 조선의용대 본부는 광복군으로 합류하여 제1지대로 편성되었다. 김원봉이 좌우합작 정부의 군무부장으로 취임하여 활동하던 시기인 1944년 5월 27일, 선생은 부상 후유증으로 35세의 젊은 나이로 서거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5월 한 달간 전시하는 한편, 순국선열유족회에서도 이 달의 독립운동가 학술강연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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