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독립운동가 곽종석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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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6-02작성자 관리자조회수 251 |
◈ 을사늑약 체결 반대투쟁 전개 ◈ ◈ 3·1운동 때 파리장서 운동을 주도한 유림의 대표 ◈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3·1운동 때 파리장서를 보내는 등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면우(俛宇) 곽종석(1846.6.24 ~ 1919.8.24) 선생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발표하였다. 선생은 1846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영남의 대유학자이자 주리론의 대통을 이은 한주 이진상의 가르침을 받고 퇴계학을 계승하여 한말 유림을 대표하는 유학자 가운데 한 분으로 부상하였다. 선생은 1896년 각국 공사관에 ‘천하포고문’을 보내 갑오왜란 이후 명성황후 시해사건, 단발령 강요 등 일제의 침략만행을 맹렬히 규탄하였다. 1905년에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여 국권을 강탈하자 반대투쟁을 폈으며, 매국노을 처단하고 을사늑약을 철회할 것과, 국제법에 의거하여 일본의 죄상을 전세계에 널리 알릴 것 등을 주장하는 상소투쟁을 벌였다. 뿐만 아니라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토지를 매각하여 의연금을 보내는 등 이에 적극 동참하였다. 특히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영남 유림을 이끌고 호서유림과 연합하여 파리장서운동을 전개하였다. 유림 대표로 독립청원서를 작성한 뒤, 상해로 김창숙을 파견하여 파리강화회의로 보내는 한편, 영어·불어·중국어 등으로 번역하여 각국 공사관 및 언론기관에 보냄으로써 한국민족의 자주의지와 독립결의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렸다. 이로 인해 일경에 피체되어 2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 옥고로 인해 1919년 6월 22일 병보석으로 출옥하였다. 하지만 병이 악화되어 같은 해 8월 24일, “군자는 마땅히 만세를 위해 계획을 세워야지 한 때를 위해 계획을 세워서는 안된다”는 유훈을 남기고 74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6월 한 달간 전시하는 한편, 순국선열유족회에서도 이 달의 독립운동가 학술강연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