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강창거(姜昌擧) 선생 유해 봉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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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11-15작성자 관리자조회수 216 |
◈ 25일(월) 오전 11시 30분 인천공항 국제선을 통해 봉환 ◈ ◈ 9.26(화) 오후 1시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신혁희, 원재룡, 박도백 선생 유해와 합동안장식 거행 ◈ 국가보훈처(처장 박유철)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여 일제의 지배체제를 비판하는 등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선 강창거(1910.9.16~2004.11.17) 선생의 유해를 25일 국내로 봉환한다. 일본 오사카시에 안장되어 있던 선생의 유해는 25(월) 오전 11시 30분 국군의장병의 운구 행렬에 맞춰 인천공항 국제선 입국장을 통해 봉환되어 운구차량 편으로 국립대전현충원 봉안관에 임시 안치된 후 26일 오후 1시에 신혁희·원재룡·박도백 선생의 유해와 합동안장식을 갖는다. 합동안장식은 대전국립현충원에서 김홍식 대전지방보훈청장, 광복회장, 대전지역 기관장, 유가족, 광복회원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안장대상 독립유공자에 대한 약력보고, 국가보훈처장·광복회장 추모사, 헌화·분향, 조총 및 묵념을 하고 애국지사 제 3묘역으로 봉송되어 영원한 유택을 마련하게 된다. 이로써 국가보훈처는 국외안장 독립유공자 유해 347位의 가운데 107位를 국내로 봉환하여 민족의 성지인 국립묘지에 안장함으로써 독립유공자의 명예를 선양하였으며, 미 봉환된 240위 중 소재가 확인된 90位는 현지에서 묘소를 단장해 한민족의 민족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강창거 선생은 1926년 제주공립농업학교 2학년 재학 중 일본인 교사 야나기다(柳田彦二)의 한국인 차별 및 부당한 교육에 항거하며 동맹휴학을 하였다가 주모자로 지목되어 퇴학당하였으며, 같은해 9월 경성사립중앙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1927년 동맹휴교를 전개하다 일시 구속되기도 하였다. 1929년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31년 6월 중순 사립양정고등보통학교 교정에서 수명을 모아놓고 일제의 지배체제를 비판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 6월이 선고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만기 출소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