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晴蓑) 조성환선생 서거 60주기 추모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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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8-10-16작성자 관리자조회수 529 |
◈ 서거 60주기를 맞아 처음으로 백범기념관에서 추모식 열려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을 역임하시면서 한국광복군 창설의 기틀을 마련하신 “청사(晴蓑) 조성환선생 서거 60주기 추모식”이 7일(화) 오전 11시에 백범기념관 대회의실에서 광복회(회장 김영일) 주관으로 열린다. 이날 추모식에는 김 양 국가보훈처장, 김영일 광복회장, 최근덕 성균관장, 광복회원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시준 단국대학교 교수의 사회로, 석근영 광복회 서울지부장의 약력보고와 광복회장의 식사에 이어 성균관장과 국가보훈처장의 추모사와 소프라노 김연수씨의 추모의 노래, 헌화분향과 조총 및 묵념, 손녀 조은옥(미국 거주)씨의 유족대표 인사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추모식에 이어 김희곤 안동대학교 교수의 “독립군 기르고 광복군 만든 군사전문가 임시정부 군무부장 청사 조성환”이라는 주제로 학술강연 뒤, 효창공원 임정요인 묘역에 안장되어 계신 선생의 묘소를 참배한다. 청사 조성환선생(1875.7.9~1948.10.7)은 서울 낙원동에서 출생하였으며, 1906년 안창호, 이동녕, 김구 등과 더불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구국운동을 전개하였고, 신민회 동지들과 구국방략을 협의하고 북경으로 망명하여 이곳을 근거지로 간도, 노령 등지를 편력하면서 독립운동의 터전을 다지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1916년 9월 신규식, 민충식, 박은식 등과 체화동락회를 조직하여 교민의 단결 및 재외한인단체와의 연락을 유지하면서 항일운동에 전념하면서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고 청소년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1918년 11월에는 39명의 대표 중 1명으로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을 발표하여 한국민의 독립의지를 공표하였으며, 3·1독립운동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적극 참여하여 제1회 의정원회의에서 노령 대표의원 및 군무차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무력투쟁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고 1920년 북로군정서 조직에 참여하여 참모장에 임명되었고, 무기 구입 등 독립군의 무장 및 전력 강화에 주력함으로서 청산리독립전쟁에서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국민회 등 10개 독립운동단체들이 밀산(密山)에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여 서일(徐一)을 총재로 추대하게 되자 홍범도, 김좌진과 함께 부총재에 선임되어 독립군을 이끌었다. 1925년 3월에는 영안현(寧安縣)에서 김혁, 김좌진, 나중소 등과 신민부(新民府)를 새로 조직하여 외교부 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목릉현 소추풍(穆陵縣 小秋風)에 성동(城東)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이범윤과 같이 고문에 추대되어 교육훈련을 지도하였다. 1932년 국무위원에 선임된 이후 광복시까지 군무부장 등 국무위원으로 계속 임시정부를 이끌었으며,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화북(華北)지구에 파견되어 병사모집, 군사훈련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등 광복군 창설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광복 이후 대한독립총성국민회 위원장, 유도회 성균관 부총재 등을 역임하다가 서거하여 효창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