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독립운동가 남상목(南相穆)선생 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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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9-01-13작성자 관리자조회수 492 |
◈ 지지 않는 별, 영원한 경기 의병장 ◈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1907년 정미의병 때 경기도 광주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다 밀고로 붙잡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하신 선생의 공훈을 기리고자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올해는 선생이 순국하신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선생은 1876년 4월 12일(고종 13년)에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하산운리(현 성남시 분당구 하산운동)에서 의령남씨 진희(晉熙)의 장남으로 태어나 유교 가풍 속에서 한학을 수학하여 경학은 물론 주역과 병서류에도 조예가 깊었다. 선생이 29세 되던 해인 1904년, 일제는 러시아와의 전쟁 수행을 위해 한일의정서를 체결, 강제로 조선인의 인력과 재원을 수탈하기 시작하였으며 급기야 그해 5월경에는 선생의 고향인 낙생면 하산운리의 수목을 무기 자재로 사용하기 위하여 낙생면과 언주면, 돌마면 등 3개 면민을 동원하여 노임도 지불하지 않은 채 수목의 벌채를 강행하기 시작했다. 이에 선생은 일본인 감독관 나가이(中井)를 폭행하는 등 적극적으로 항거하였고, 이로 인해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온갖 체형을 당하고 풀려났다. 이 사건으로 선생은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구국 일념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을사조약 늑결, 고종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등 정국은 더욱 악화 되었고, 일제의 침략 야욕은 한반도 전체를 뒤흔들었다. 정미 조약의 부수각서에 의해 8월 1일 한국군이 강제로 해산되어, 나라의 존립자체가 위태롭다고 느낀 선생은 고향인 경기도 광주 일대에서 의병을 모아 항거하였고 선생의 휘하에는 구국의 일념으로 무장한 의병이 운집하기 시작했다. 선생은 1908년 8월경에 김재선 등을 자신의 의병부대에 편입시켜 김재선을 좌익장, 강춘선을 후군장, 송주상과 김태동을 종사, 김경화와 이시영을 포군으로 임명하여 전열을 정비하고 음성에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전개하였다. 선생의 휘하에서 활동한 김태동의 관련 기록으로 보아 남상목부대의 활 동 범위는 경기도 용인 일대에서 충북 지역까지 펼쳐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생은 1908년 11월, 판교의 가족을 만나러 가던 중 밀고를 받고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느릿골’에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복역하던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생긴 장파열로 1908년 11월 4일에 형무소에서 순국하셨다. 선생의 유해는 청계산 아래 ‘후천골’에 가매장 되었으며 해방 후 고향인 성남시 하산운동의 ‘뒷내골’ 선산에 안장되었다가 대전의 애국지사 묘역에 부인 이순이(李順伊)여사와 합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