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일(토) 오후 2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겸 초대 국무총리를 역임하고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성재 이동휘 선생 74주기 추모식」이 1월 31(토) 오후 2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사)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회장 조향록) 주관으로 열린다.
이 날 추모식은 신영교 서울남부보훈지청장, 승병일 광복회 부회장, 기념사업 회원, 종친회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약전봉독, 기념사업회장 식사와 서울남부보훈지청장의 추모사, 헌화·분향 등으로 진행되며, 추모식에 이어 위패가 모셔진 충열대 무후선열제단에 참배하는 순으로 진행된다.
이동휘 선생(1873.6.20~1935.1.31)은 함경남도 단천에서 출생하여 1895년 한성무관학교(漢城武官學校)에 입학·수학한 뒤 육군 참령까지 진급하였고, 1902년부터는 강화도 진위대장(鎭衛隊長)으로 활동하였으며, 1906년 진위대장을 사임한 뒤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설립하는 한편,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결성에 동참하는 등 민족주의 교육과 구국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강화도 전등사에서 의병을 일으키려다 실패하고, 1908년 이동녕·안창호 등과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1911년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피체되어 3년간 유배되는 고초를 겪었으며, 1912년 가을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유배지를 탈출, 북간도로 망명하여 국자가(局子街) 소영자(小營子)에서 김립(金立)·계봉우(桂奉瑀) 등과 광성학교(光成學校)를 설립하여 민족주의 교육활동을 전개하였다.
1913년에는 블라디보스톡 신한촌(新韓村)을 중심으로 권업회(勸業會)에 가담하여 이상설·이갑·신채호 등과 함께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민족해방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914년 중국 왕청현(汪淸縣) 라자우거의 한인촌으로 거점을 옮겨 대전무관학교(大甸武官學校)를 설립, 독립군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3·1운동 직후 블라디보스톡에서 문창범(文昌範)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고, 1919년 대한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 취임하여 독립군 양성에 헌신하였으며, 8월 말경에는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다.
1922년부터 1924년까지 상해와 연해주를 주 무대로 국민대표회 집행위원과 국민위원회(國民委員會)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였고, 그 후 국제혁명자후원회 간부로 혁명운동 과정에서 희생되고 고통 받는 혁명가와 그 가족들을 돌보던 중 1935년 1월 31일, 62세를 일기로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