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독립운동가 윤병구(尹炳球)선생 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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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9-07-01작성자 관리자조회수 1,118 |
◈ 미주 한인사회 민족운동의 영원한 등불 ◈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신민회에 참여하고 ‘에와친목회’ 대표로 대한제국의 독립청원을 위해 앞장섰으며 ‘대한인국민회’ 회장으로 미주지역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던 윤병구 선생의 서거 60주년을 기리고자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1903년 10월 5일,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 정착한 선생은 목회자로서 그리고 미주사회의 중심인물로서 한인사회의 화합과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에 평생을 바친 인물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가기 이전, ‘한성사범학교’에서 헐버트의 영향으로 기독교 목회자의 길을 선택한 선생은 하와이 이민 후 한인 동포를 대상으로 한 전도활동에 전념하는 한편 하와이에서 조직된 ‘신민회’를 통해 국권회복 활동과 ‘에와친목회’를 결성하여 일본 상품 배척 및 동포들의 친목과 권익보호를 위해 힘썼다. 1905년 7월 12일, 선생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러일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 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하고자 이승만과 함께 워싱턴으로 가서 직접 청원서를 전달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미국 정부는 일본과 비밀조약을 체결해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를 묵인한 후였다. 이후 선생은 한인들의 단결과 민족운동의 방향을 논의하였고 합방반대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12년 11월 ‘대한인국민회’ 제2대 중앙총회장에 당선되어 각 지방을 순방하며 한인들에게 독립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노력 하였고, 3.1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이를 미주 한인사회에 널리 알려 독립운동의 열기를 북돋았다 또한 1929년부터 1936년까지 뉴욕 한인교회 목회자로서 뿐만 아니라 한인유학생 지원 등 교회 밖에서까지 다양하게 활동했다. 이러한 선생의 지원으로 뉴욕한인교회 소속의 많은 인물들이 일본의 만주침략에 항의하는 적극적인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도미 후 46년 만인 1949년 3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고국에 돌아 온 선생은 대한민국정부를 승인한 우방국 방문 친선외교 및 한미간의 새로운 협약 작성의 중책을 맡아 밤새도록 혼신의 힘을 기울이다 1949년 6월 20일 아침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