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 유해발굴 추진 상황 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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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1-03-14작성자 관리자조회수 1,842 |
◈ 1910. 3. 26일 오후 일제 관동도독부, 안중근 의사 재판 관계자에게 상여금을 지급하고 축하연 개최 - 일제의 지속된 긴장 상황을 암시하고 유해 매장 기록 문건에 대한 기대 가능성을 높여 ◈ 일본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발굴을 위한 자료 제공에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성과로 진정성을 보여 줄 것을 촉구 ▣ 1910년 안중근 의사 순국 당시 소노키(園木) 통역의 보고 전문(電文)과 많은 신문이 의사의 유해는 감옥(공동)묘지에 묻혔다고 보도한 바에 따라, 2005년 우리 정부는 안중근의사 유해발굴사업을 남북한 협력 사업으로 선정하여 남북 실무진의 4차례 접촉과 공동유해조사단의 현지 조사를 거쳐 유력한 유해매장 추정지를 선정한 후, 2008년 3월부터 4월까지 29일간에 걸쳐 발굴한 바 있지만 유해를 찾지 못하고 현재에 이르렀다. 2010년 3월 22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앞두고, 이명박 대통령이 관련국의 협조를 얻어 유해발굴사업을 추진하도록 특별 지시함에 따라, 금년 4월 28일 「안중근의사 유해발굴 추진단」이 구성되었다. 이에 「안중근의사 유해발굴 추진단」에서는 안 의사 순국 후 100년이 지나는 동안 의사의 유해를 찾지 못하였고, 유해매장에 관한 많은 설들이 있었던 저간의 상황으로 볼 때 안중근 의사의 유해발굴은 일조일석에 성취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보고, 지혜와 지식과 정보를 모을 필요가 있음을 다 같이 인식하였다. 아울러 끈기 있는 연구와 지속적 자료수집 활동이 절실하다고 판단되므로, 우선 1단계로 유해매장 관련 증거자료 수집에 매진하고, 그 결과에 따라 2단계 사업으로 매장지 발굴에 착수키로 하였다. 다음은 그간 「안중근의사 유해발굴 추진단」의 활동과 수집 자료 중 일부분이다. ▣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후 일제는 재판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형을 가할 것을 미리 결정하고 나서 재판을 통해 드디어 사형언도를 내렸는데,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는 이 안중근 사건에 공로가 있는 ‘재판관계자’에게 다음과 같이 보상금을 지급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마나베(眞鍋) 재판장 150원, 미조부치 검찰관 250원(圓), 소노키(園木) 통역 200원, 기시다(岸田) 서기 80원, 와타나베(渡邊) 서기, 武內 서기 80원(이상 법원) 구리하라(栗原) 전옥 150원, 나카무라(中村) 간수부장 80원, 아오키(靑木) 간수부장 50원, 다나카(田中) 간수 이하 6명 10원~45원(이상 감옥) 요시다(吉田) 경시 50원, 사이토(齊藤) 경부 30원, 탄노(丹野) 부장, 히라바야시(平林) 판사, 토다(戶田) 판사 각 20원, 가마다(烟田) 순사, 시오가와(鹽川) 순사, 야마모토(山本) 경사, 나카무라(中村) 경사, 가미시모(神下) 경사 각 10원“ (1910.3.29. 만주일일신문(滿洲日日新聞) 보도 내용) 동시에 사형이 집행되고 유해를 비밀리에 처리한 뒤 법원장 집에서 재판 관계자에게 축하와 위로의 연회를 열었던 사실도 확인되었다. 안중근의사를 교수형(絞首刑)에 처하고 매장을 끝낸 데 대해 재판에 관계했던 일본인 관리들은 마치 국경절(國慶節)을 맞은 듯 기뻐했던 것이다. “3월 26일 안중근의 매장이 끝났다는 보고가 있은 지 얼마 후 5시에 안중근 재판의 최고책임자인 뤼순고등법원장(旅順高等法長) 히라이시 요시토(平石義人)의 관사에서 안중근 사건 관계자 위로만찬회(慰勞晩餐會)라는 이름으로 축하연을 개최하였는데, 안중근의 재판에 관여한 다음과 같은 인사들이 모였다. 내빈(內賓) 關東都督部 사토 경시총장(佐藤 警視總長), 요시다 경시(吉田 警視), 旅順監獄 구리하라 전옥(栗原貞吉 典獄) 辯護士 미즈노(水野), 가마다(鎌田) 言論社 나가노(中野)(自由通信), 안사이(安齋)(東亞通信), 부도우(武藤)(朝日通信), 기도우(鬼頭)(滿洲日日新聞), 쓰노다(角田)(遼東新聞), 야노(矢野)(滿洲新報) 주최측(主催側) 高等法院長 히라이시(平石), 檢察官 미조부치(溝淵), 判官 다이와다(大和田), 通譯 소노키(園木), 書記 와다나베(渡邊), 다케우치(竹內), 오카다(岡田), 기시다(岸田) 이상 主客 20명은 오후 5시에 집합하여 기념사진(紀念寫眞)을 촬영한 후 응접실에서 바둑을 두다가 6시가 넘어 악기 연주를 듣고 갈채를 보내었다. 다음 주최자 히라이시(平石) 법원장의 인사말에 이어 내빈을 대표한 사또 경시총장의 답사가 있은 뒤 곧 파성(巴城)과 미광(末廣)의 두 고급 요정에서 불러 온 미인(紅裙)들이 술잔치를 벌리고, 끝에는 각자 득의(得意)의 숨은 재주(隱藝)를 뽐내는 등 매우 성황에 이르렀고 10시가 넘어 산회(散會)하였다.“ (1910.3.29. 만주신보(滿洲新報), 만주일일신문(滿洲日日新聞) 보도 내용) 사형수에 대하여 사형을 집행하고 나서 재판관과 검찰관 공히 상여금을 지급받고 축하연까지 개최했다는 것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천하의 웃음거리이다. 이는 일제가 안중근 의사에 대한 재판을 의도한대로 조작 진행하기 위해 얼마나 긴장하였던가를 암시하고도 남음이 있다. 사형수의 유해 문제에 있어서는 유족이 요청하면 돌려주는 것이 당시 법에 비추어 당연하고도 적법한 절차였음에도, 안중근 의사에 대하여는 그 유해를 유족에게 교부하기를 거부하고 그들 마음대로 처리한 후 만찬 축하연까지 가졌다는 이러한 사실로 추측하건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당일은 정해진 장소에 묻혔다 하더라도 그 후 어떠한 조작이 가해졌는지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또한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사형집행과 매장 후 저녁 상황에 관한 이 보도 기사는, 그 직전의 안 의사의 유해 매장에 관한 진실을 알려 줄 기록물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을 더욱 굳게 한다. ▣ 한편 외교 경로를 통하여 일본·중국·러시아에 안중근 의사의 유해발굴에 협조를 요청하였다. 특히 일본은 비록 선대(先代)의 일이지만 안중근 의사 유해를 비밀리에 처리한 당사국으로서, 의사의 유해매장 처리에 관한 상세한 보고 자료가 있을 것이므로 이를 적극 조사 제공해 줄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관련 자료를 찾았으나 기 공개된 자료 외에 추가적인 자료를 찾지 못했고, 계속 조사를 해 나가겠다.” 이러한 일본 측의 답변은 종전에 비해서는 다소 진전된 것이긴 하지만, 그 결과가 없는 만큼 앞으로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성과로 진정성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또한 일본정부는 과거 어두운 역사를 정리하고 양국 간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데 있어서, 안중근 의사의 유해발굴 문제는 꼭 풀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항이라는점에 대하여 진지하고 현명한 통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