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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년을 기억하라
작성일 2014-05-03작성자 이대수조회수 755

1964 년을 기억하라


기억하라 1964년을........

이 용식/문화일보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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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남한 경제력은 북한의 절반 수준이었다.
수출 1억 달러, 1인당 소득 100달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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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여 독립국 중 북한은 4ㅇ위권,

한국은 100위권 밖의 최빈국이었다.


6·25전쟁 뒤 10년 동안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시행착오를 계속했고,

 

북한은 김일성 유일체제를 구축했다.
남한 경제는
미국 원조가 줄어들면서

만성적 빈곤에 시달렸고, 북한 경제는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 경제의 활성화에 힘입어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일본은 1964년 도쿄올림픽을 개최하면서 패전국에서

다시 경제강국으로 일어서고 있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안보와 경제는 훅 불면 날아갈 정도로 취약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5·16쿠데타 이후

1963년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간신히 이긴 뒤 새해를 맞았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외화 부족으로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수출 제일주의’ 결단을 한다.
그러나 수출할 물건이 없었다.
결국 여성들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팔기 시작했다.
구로공단이 조성되면서 가발산업으로 발전했고,

1969년에는 수출 1위 품목이 됐다.

박 대통령이 독일에서 제공한 비행기편으로 독일을 방문,

광부와 간호원 앞에서 눈물의 연설을 하고

<파고다 담배 500갑>을 선물로 주고 온 것도 1964년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만으론 턱없이 부족했다.
매국노에다 전쟁 용병 비난을 각오하고 한·일 국교정상화와 월남 파병을

결단했다.

당시의 심정에 대해

 

“내가 죽은 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말을 남겼다.

그렇게 10년, 1974년 가까스로 북한 경제를 따라잡았다.
남한의 추격에 위협을 느낀 김일성은 박정희 암살을 위해

1·21사태로 청와대를 기습하는등의 공작을 펼친다.

다시 10년이 지난 1984년 최강국인 미국과의 교역에서

흑자를 실현하기 시작했다.
경제적 자립 능력을 확보한 셈이다. 세계는 ‘한강의 기적’으로 명명했다.
이렇게 형성된 중산층과 고학력층은 1987년 넥타이부대로
성장하고,
지속가능한 민주주의를 이루는 토대가 됐다.

독일 탄광과 월남 정글에서 목숨을 걸었던 청년들,
1970년대 사막에서 돌관작업을 마다하지 않았던 산업전사들의
희생과 헌신이 없었다면 ‘응사 세대’(94학번등 오늘의 40대를

칭함)의 낭만은 없었다.

1964년의 교훈은 선명하다.
국민은 자식 세대에 무식과 가난을 물려주지 않으려던 1964년은

대한민국 도약의 원년(元年)이다.
6·3사태<굴욕적 한 일회담 반대>를 겪으면서까지 대일청구권 자금을 받았고,

이는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등 산업인프라 구축의 종잣돈이 됐다.
월남 파병은 한·미동맹을 진정한 혈맹으로 강화시켰고,
짧은 기간에 수출 및 국내 산업 발전, 해외 경험 축적 등의 부수적

효과를 올렸다. 파병 세대는 1970년대 ‘산업 전사’로 탈바꿈해

중동의 사막에서 세계인을 경탄시켰다.


젊은이들의 피땀은 세계 경제가 오일쇼크로 휘청거릴 때

‘경공업→중공업’ 도약을 이뤄내는 원동력이 됐다.

최근 ‘응답하라 1994’(이하 : 응사) 드라마가 화제를 모았다.
물질적 풍요, 정치적 민주화가 이뤄진 1994년 대학생들이 40대가

되어 학창시절의 낭만을 회고하는 내용이다.
이들의 꿈과 사랑
, 도전과 성취 모두 아름답다.
그러나 잊어선 안될 사람들이 있다.

1960년대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야 했던 소녀들,
학업을 포기하고 장시간 노동을 했던 여공들,
기 위해 고난을 견뎠다.

지도자는 결단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신년 연설(연두 교서)에서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먹고살 수 있는 토대를 닦자”며
“내 스스로 삽과 괭이를 들고 증산과 검약에 앞장설 것”임을

약속하고 국민 동참을 호소했다.

최대한 소통하면서도 필요할 땐 악역을 피하지 않았다.
한편에서는 일신의 영달을 포기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
압축 발전의 이면에 적지 않은 희생과 문제점도 있었다.
이들 모두에 대해 종합적으로 바라보고 공과를 따져야 한다.
한쪽만 부각시키는 ‘편향’은 선동이고 왜곡이다.

과거를 잊은 나라에
미래
없다.
1994년뿐만 아니라 1964, 1974, 1984년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1964년의 주역인 7080세대는
자신의 경험을 자식 세대에 올바르게

전해야하고,응사 세대’는 그 시대를 살아 있는 역사로서 알아야 한다.

최성렬씨의 시원한 글

<나도 박정희를 독재자로 불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아니, 전혀 아닐뿐만 아니라 그가 없었으면 이 나라도 없을뻔했던

역량있는 지도자였다. 그는 군인이면서 선비요 先知者요 철학자로서

나라를 5천년 빈곤에서 번영으로 改造시킨 영웅이다>

그가 대통령선거 때만 되면 나라의 역적이 된다.
이 나라의 백성은 분명히 天罰을 받는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민족에게 축복이 있을리 萬無하다.
그것은 하늘의 법칙이다.
빛을 아무리 골고루 비추어도 그늘은 있게 마련이다.
그 그늘은 나중에 格에 맞게 보상해 주면 된다.
6.25 戰歿장병 유족에게 주는 연금은 고작 10여만원이라고 한다.

그것도 안된다면 이렇게 하자.
자동차사고로 인한 사망자를 없애려면 자동차를 버리면 된다.
터널공사에 도롱룡이 죽으면 그 공사를 안하면 된다.
구럼비바위가 소중하면 해군기지를 건설하지 말자.
왜 누우떼는 악어에게 잡아먹히면서 마라江을 건널까?
그 강을 건너지 않으면 되는데. 멍청이 바보들.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에 위령탑이 서 있다.
그 고속도로 건설에 77명의 숭고한 생명이 죽었다.
그 공사를 안했으면 희생도 없었을 걸.
그래서 김선생은 건설현장에 드러누어 나를 밟고 가라며 반대했다.
대단한 先見者였다. 그래서 노벨상을 탔다.

維新은 소수의 희생에 전체가 埋沒되는 그런 현상을 打開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나는 감히 말한다.
유신은 아직 갈 길이 먼데 그리고 벌여 놓은 일을 마무리를 해야 하는데
일부 국민들은 독재의 손을 놓으라고 극렬하게 반대를 위한 반대를 했다.
조금만 참으면 더 좋은 날이 오고 독재는 좋게 끝날 수도 있었을 것을.


나는 조국산천이 樹木으로 울창한 모습에 눈물이 난다.
四通八達로 뻗은 도로와 교량을 보면서
나의 조국이 언제 이렇게 발전했나 두 눈을 비빈다.
북한의 초라한 민둥산을 보며 나의 幼少年기를 생각한다.
넘쳐나는 음식물쓰레기를 보며 옛날에 먹었던 멀건 죽을 想起한다.

교과서만 있다고 공부가 되나?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와 공부를 하고 싶도록 動機부여를 해야한다.
세계가 그를 벤치마킹한다. 후진국들은 대한민국 새마을운동을 배워간다.
그런데 그것으로 성공했다는 나라를 들어본 적이 없다.
理論과 制度를 가져다 놓는다고 그것이 저절로 자라나?

動力이 필요한 것이다. 흔들어야 물결이 퍼져나간다.
이것이 지도력이고 그것을 행하는 자가 指導者다.

항상 구성원에는 방관자와 반대자가 있다.
그들을 솎아내지 않으면 제도가 발전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을 정확히 가려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 무리를 제거할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이 성장의 그늘이다.

5.16은 헌법을 위반한 정치적 구데타가 맞다.
그런데 그 구데타가 나라를 구했다면 不可不 혁명으로 인정을 해야한다.
나라가 발전하며 그늘이 생겨 저항에 부딪힌다.
배가 부르니 생각도 많아져 저항도 그 위세가 커진다.
그것에 굴복하면 지금까지 이룩한 성공신화가 모두 물거품이 된다.
다시 한번 구데타의 필요성이 요청된다. 바로 그것이 維新 아닌가?

항상 구데타는 피를 흘리는 법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법이고

반대자가 있으니까. 그러나 5.16은 총알 한방 피 한방울도 없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국민 대다수가 바랬던 혁명인 것이다.

세계 역사상 구데타가 18년을 유지하고,

국토가 桑田碧海로 발전하고 국민소득이 천 배로 뛰며
쌀이 남아서 골치를 썩이는 그런 구데타가 있었다면 누군가 말해보라.

나는 그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왜 그런지 나도 모른다.
내 어머니의 죽음을 생각해도 눈물은 나지 않는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니 이런 것이다.

 

나는 그의 경제적 業績에 물론 감사하지만 나의 눈물은 그가 나라와

백성을 엄청나게그리고 眞心으로 사랑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흘러

나오는 것이다.

그런 독재라면 나는 이 나라가 영원히

민주국가보다 독재국가이기를 바란다.

▲이 용식/문화일보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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