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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북도 임실군 소충사(昭忠祠) 답사 및 Monitoring.
작성일 2014-11-22작성자 송철효조회수 8,347

■. 전북 임실군 소충사(昭忠祠) 답사 및 Monitoring.

●. 개 요.

2014년 11월 22일 오늘은 이석용 의병장외 28의사의 항일투쟁과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순절하신 충의열사의 호국정신 계승 및 임실출신의 독립

유공자 묘역과 유물을 한곳에 모셔 항일 독립운동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한(1992 ~ 2002.11월) 소충사(昭忠祠)를 답사

및 Monitoring하였습니다.

●. 내 용.

▲. 소충사(昭忠祠) 건립.

◭. 구(舊) 소충사는 성수면 양지리 학당마을에 1957년 07월부터 423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사당1동(8평)과 강당1동(8.5평)을 조성하기시작 약 3년간 사업으로 완공을 보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조의단(弔義壇)이라는 휘호를 받아 의병대장 정재 이석용의병장과 28의사의 위패를 봉행하였으며 순절한 날이 각기 달라 매년 음력 07월 07일 칠석날 면민 모두가 참여하여 합동으로 제례를 거행하였다.

◭. 소충사(昭忠祠) 성역화사업 계획에 따라 1993년도에 2억1천4백만원의 예산을 들여 성수면 오봉리에 부지 2만평을 확보하고 1994년부터 2000년까지 16억 4천만원을 들여 시설을 완료하였다. 그후 2002년 08월 15일부터 성수면 양지리 구 소충사(昭忠祠) 사당에서 현(現) 소충사(昭忠祠)로 위패를 모셨다.묘지는 의병당시 격전지이었던 운현(雲峴)의 지주골(蜘蛛谷)과 오봉리 큰 저수지 아래 골짜기에 모셔져 있었으나 많은 지인(知人)들의 발의로 면민들의 의견을 모아 면 자체사업과 군의 지원을 받아 월평리 신촌마을 산1번지에 운현(雲峴)에 계신 17위(位)와 오봉리에 계신 11위(位)를 합하여 1988년 05월 18일 28위(位)를 함께 모셨다.

◭. 현 소충사 건립추진 중 1995년(乙亥)11월 19일 (巳時) 청명한 날씨에 월평리 신촌마을 앞에 간좌곤향(艮坐坤向)으로 계신 28의사들의 묘(墓)를 파묘하고,  정재 이석용 의병장은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月出山)아래 가지동(可之洞)에서 모셔와 군부대의 협조를 받아 장병 10여명이 엄숙한 자세로 현 소충사 묘터에 운구하고 11월 20일 오후 2시에 의병장과 배위를 합장하여 먼저 하관을 하였으며 묘역을 만드는 과정에서 28의사는 10위씩 삼열로 배열하여 안장하고 묘지를 조성하였으며  오후 04시 30분에 제사를 마쳐 이장을 완료 하였다. 

●. 배경 과 활동.

▲. 배경.

◭. 이석용은 고향인 임실지방을 본거지로 의병을 모집하여 일본군과 싸울 준비를 하였다. 이때 나이 29세의 청년이었다. 그는 상이암을 비롯하여 전주 임실 장수 진안 남원 순창 곡성 함양 등지를 두루 다니면서 동지를 규합하였다. 한편 당시의 정부를 비롯하여 일본정부 앞으로 규탄 문을 발송하고 전국의 동포에게 민족의 주권을 되찾자는 격문 건의문 호소문 등을 발송하였다. 광무 11년(1907년) 일본과 친일 대신들은 고종을 위협하여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주게 하였다. 순종이 왕위에 오르자 우리나라의 주권은 뿌리 채 일본의 손아귀에 들게 되었고 순종은 허수아비와 같은 임금 자리만을 지켜야 했다. 즉 친일파 대신들과 침략자 왜인의 각본에 따라 이해 07월 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왜인들로 하여금 조선정부 요직의 고문을 맡게 하는 등 모든 정책 결정에 관여하였다. 이에 의분을 참지 못한 정재 이석용은 의병 기의(起義)를 서둘렀다.

◭. 이해 08월 26일 그는 아버지 앞에 하직인사와 이튿날 28일 선영에 고별 제를 지내고 09월 01일 종친들에게 하직인사를 올렸다. 09월 02일 그는 조직된 참모들을 불러 의논하고 의병대의 이름을 호남의병창의동맹단(湖南義兵倡義同盟團)이라 하였다. 09월 04일 운현(雲峴:지금의 대운재)의 절정(絶頂)에 처음 진을 치고 석전리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그 수가 20여명에 달했다. 09월 05일부터 진안과 장수 임실의 주요지역을 돌며 의병 모집과 함께 왜적을 향하여 기습을 하니 왜적들이 모조리 전주 쪽으로 도망을 쳤다.

▲. 활 동.

◭.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곳 저 곳으로 진을 옮겨가면서 의병활동을 진해하는 가운데 사방 열읍(列邑)에 격문을 띄우고 마침내 09월 12일 마이산(馬耳山)에서 의병 거사 궐기대회를 개최 하였다. 그동안 모집하였던 모든 의병들을 마이산 남쪽 용바위(龍岩)에 모이게 하고 나무를 벌채(伐採)하여 단(壇)을 쌓은 뒤 호남의병창의동맹단(湖南義兵倡義同盟團)이라 크게 써서 깃발을 걸게 하였다. 제단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는 각각 기치(旗幟)를 세우게 하고 기폭(旗幅)에는 정기가(精氣歌)  단심가(丹心歌)는 문천상(文天祥)이 순절한 시시(柴市)와 정몽주(鄭夢周)가 절사(絶死)한 선죽교(善竹橋)와 함께 비춰 충렬(忠烈)의 소거를 같이하에. (竹橋柴市烈同聲)라고 써 꽂아놓았다. 이 자리에 모인 의병들에게는 의병창의(義兵倡義) 라 수건에 써 머리에 동여매게 하였다. 이때 모인 이병은 모두 5백여 명에 달하였으며 부근의 부모형제와 장정들이 모여 주위 산봉우리에서 파수를 보았으니 이날의 거사를 성원하기 위해 모여든 민중들의 수까지 합하면 천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 그는 의병을 거느리고 진안 마령을 거쳐 진안읍 앞산에 있는 우화정(羽化亭)에 본진(本陣)을 치고 집중포화를 쏘아대니 왜군은 옷도 입지 못한 채 전주로 도망쳤다. 그 후 14일부터 가치(歌峙)에 당도하여 용담(龍潭) 심원사(深源寺)에 주둔하다가 진을 숭암사(崇巖寺)에 옮겼다. 선봉장이자 포장(砲將)인 박만화(朴萬華)가 적에게 접근하여 왜병 두 명을 사살하고 적의 흉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전사하였다. 이때 나이 어린 의병 박철규(朴哲圭)와 허천석(許天錫)도 아깝게 전사하였다. 27일 운현(雲峴)에 이르니 원근(遠近)의 부하들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모두 모였다. 12월 07일부터 전주 상관 09일 회침리 11일 남원 산실(山室) 13일 목동 14일 순창 동심리(同心里) 15일 밤부터 학산 17일까지 월면리를 들러 옛 부하를 만나고 잿말을 거쳐 18일에는 백련산의 이윤리에 들어가 대장간을 설치하고 무기를 개조하며 수리하였다. 1908년(융희2년) 01월19일 지사옥산 성수 계월 20일은 도봉에서 흩어졌던 의병을 규합하고 02월 01일 학산에 군사를 이끌고 04일에는 둔덕방에 들러 왜놈집에 불을 지르고 가짜의병 한명을 총살하였다. 12일 운봉 황산에 13일 밤 인월 장터를 지나 함양 땅으로 들어갔다.

◭. 03월 18일 이방리에서 의병 3명이 전사하였으니 그는 하늘이 어찌 이에 이르게 하는 가하고 탄식하였다. 03월 21일 아침 비가 오는데 운현(雲峴)에 나아가 확인한 결과 따르는 군사는 겨우 16명 전사자가 16명이며 포로로 잡힌 의병이 두 명 부상자가 세 명이었다. 그때에 최 포장이 총탄에 맞으면서도 적에게 총 두발을 쏘아대고 꾸짖으며 말하기를 왜놈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죽는다. 한 후 칼을 빼어 목과 배를 찌르고 눈을 부릅뜨며 장렬히 전사하였다. 03월 27일 관촌역에서 김 중군이 왜적 한 명을 죽이고 지화(紙貨)를 빼앗았으며 문경달(文景達)이 상관(上關)에서 왜적을 쫒아 그 복장을 빼앗았다. 또 전화통을 부수고 왕방리(枉芳里)에 들어가 왜놈에게 붙어 활동하는 자를 인근 마을에 불러내어 조리돌림을 하고 총살하였다.

 ◭. 04월 28일 이석용 의병장은 운현(雲峴)의 패전한 곳에 가시덤불을 베어내어 그곳에 3척단을 만들고 조사단(弔死壇)이라 이름 지은 후 돼지 한 마리를 제물로 차려 전망 장사 28義士들의 합제를 지냈다. 그날 저녁밤은 칠흑과 같이 어둡고 소낙비에 번개가 치니 마치 신의 영험이 있음인가? 그는 통곡하며 생각하였다.

 

●. 결 론.

정재 이석용 이병장은 많은 역경 속에서 오직 구국의 정신으로 많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활동하다가 1912년 10월 13일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때가 그의 나이 35세였다. 의병장은 체포된 후 임실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고 1914년 01월 12일 전주법원에서 재판을 받은 후 그해 04월 04일 정오 호남의병장 이석용은 조국광복의 대망을 이루지 못한 채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습니다.

●. 게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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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22일. 국가보훈처 알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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