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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적지순례
작성일 2015-07-01작성자 손택수조회수 878

    베트남전적지 순례행사를 다녀와서

                대한민국상이군경회충북지부충주시지회장 손택수

순례 1일

지난 6월15일부터 6월21일까지 5박7일간 대한민국상이군경회충북도지부(지부장 강대호)주최 전적지 순례를 베트남으로 다녀왔다.

하필 국내에 만연한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으로 인하여 어수선한 분위기에 가족들의 염려와 따가운 시선을 뒤로 하고 도지부에 집결하기위해 우태원대의원과 함께 청주도지부사무실에 도착하니 모두들 들뜬 마음으로 왁자지껄 요란스럽다

청주 아일관광버스에 올라 일로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차창밖은 푸른들판에 자라는 벼들이 풍요로워 보인다.

46년전 젊은 청년 병사로 참전한 그 역사현장에 이제 늙스그레한 중늙은이로 격전이 벌어젔든 그 곳을 찾는다는 설레임에 밤잠을 설치면서 고대하였다

오후에 공항에 도착하여 수속을 밟고 일행 31명과 대한항공비행기에 오르니 모두들 상기된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하는데 마치 처음 소풍가는 어린애들같이 들뜬 모습이다.

비행기에 앉아 상념에 젓다보니 늦은 한밤에 하노이공항에 도착한 베트남땅은 46년전 부산에서 커다란 군함타고 5박6일간 망망대해 파도와 뱃멀미로 고생하면서 남지나해를 거처 초죽음이 되어 도착했때는 지금같이 평화로운 곳은 아니었다

동서 냉전시대의 인도차이나반도를 빼앗고자 하는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어 치열했든 그곳에 우리 대한의 남아들이 세계자유평화와 동남아지역 공산화를 막기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참전한 그 전쟁터에 이제는 옛전쟁터를 찾아보는 회고의 여행길이었다.

곳곳이 군부대와 무장한 군인들로 삼엄한 경계를 하고있든 그 전쟁터가 아니라 이제는 평화로운 일상의 모습들로 잘살기위한 생업의 활기찬 모습으로 분주한 베트남 국민들의 모습 어디에서도 전쟁의 흔적은 찾을수없었다

므엉탄호텔이라는 숙소에서 여장을 풀고 잠자리에 누우니 세월의 무상함과 함께 46년전 젊음과 청춘을 불살랐든 그땅에 다시온 감회가 실감으로 닥아온다.

들뜬마음으로 뒤척뒤척 좀체 잠을 못이루고 회상에 젖어 눈을 감으니 옛날 46년전 치열했든 전장의 모습들이 파노라마 같이 명멸해간다.

꿈을 깨면 지나간 세월의 흔적들이 닥아오겠지.... 파월기간 보초서면서 마음속으로 즐겨부르든 “고향의 봄” 음률을 떠올리는데 스르르 잠이온다.

순례 3일

아침에 일어나니 눈부신 햇살이 호텔창문을 뚫고 들어온다 창밖으로 바로본 멀리 하롱베이의 전경 아침은 너무나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순례2일을 다른 일정으로 보낸후

우리는 다시 버스로 하노이 시내로 이동하여 호치민광장인 바딘광장으로 향했다.

베트남 독립에 일생을 바친 월남인민의 영웅인 호치민의 무덤이 있는 바딘광장에서 호치민과 독립투사들이 베트남 독립선언을 하였다는 가이드설명에 당시 맞서 싸웠든 입장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어 묘한감정이었다

호치민의 일생을 돌아볼수있는 그당시 호치민의 거주지역을 돌아보고 또 한기둥사원이라는 베트남의 상징이라는 사원을 둘러보았으며,

최근에 말썽이 난 경남기업에서 세운 72층 랜드마크 칼라다스빌딩을 관람하면서 베트남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우리기술진이 세운 건축물이라는데 자부심을 갖기도 하였다.

하노이에서 우리 한식으로 식사를 마친 우리는 밤 비행기로 중부베트남 휴양지로 유명한 다낭공항에 도착하였다.

드디어 46년전 우리 장병들이 주둔하면서 월남평정을 위해 수많은 장병들이 피와 땀을 흘린 격전에 현장에 찾아왔다

해변가 노보텔다낭호텔에 여장을 풀고 잠을 청하면서 과연 그 격전의 현장은 어떤지 잘보존된건지 궁금함에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순례 4일

일찍 호텔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우리는 다낭에서 멀지않은 호이안에 해병 청룡부대가 주둔했든 곳중 청룡2대대6중대 전술기지 현장을 찾았다

과거 군부대가 주둔했든 부대는 폐허가되어 황폐화되어있고 지금은 주택지구이거나 공장으로 이용될뿐, 어디에도 그 주둔지터가 온존히 남아있는곳은 없다.

마침 우리 일행중 우태원 중앙대의원이 그곳에 근무하다가 작전중 부비추렙으로 두다리를 잃는 전상을 당한 부대라하여 더욱 궁금하였다

옛날 기지근처에 당도하여 휠체어에 태워 밀고가다보니 우태원대의원이 그당시 마을에 내려와 물을 길어갔다는 우물을 발견하자 이곳이 맞는다고 소리친다.

올려다보이는 중대전술기지 흔적이 있는 고지까지는 휠체어로 올라가기엔 너무 무리가 되어 “내가 올라가 사진이라도 많이 찍어올게” 하고 가파른 비탈길을 헐레벌떡 올라가 과거 중대전술기지 흔적을 찾으니 아직도 견고한 벙커 1개는 그대로 잡초속에 남아있고 그당시 전망대역할을 하든 건축물의 잔해도 일부가 남았어 사진에 담을수있었다.

병사들이 주둔했든 벙커라든가 건물 잔해는 거의 없어지고 몇겹으로 둘러처저 있든 철조망도 다걷어가고 황량한 산정상에 잡초만 욱어저 있다 . 그래도 옛 모습을 회상하라고 내려다보이는 들판하며 멀리 마을등 추억이 될만한 풍경을 부지런히 찍고 내려오니 우물가에서 기다리든 우태원대의원이 나를 보자

“여기서 옛날을 생각하다보니 갑자기 눈물이 쏟아저서 울었어!” 하는데 그 소리를 듣자 나도 갑자기 울컥 치밀어오는 격한 감정에 먹먹한 가슴을 진정시킬수가 없었다

근처에 있든 다른 다리절단 선배도 울고 또다른 전우도 눈시울을 붉힌다.

공연히 할말이 없어 “왜 여기와서 질질짜고 그래”하면서 핀잔주는 내목소리도 떨렸고 눈에도 눈물이 맺힌다.

왜 안그렇겠는가? 46년전 치열했든 베트콩소탕작전에서 적의 지뢰를 밟아 두다리를 잃는 아품을 간직한채 46년간 가숨 밑바닥에 깊숙이 감추어두었든 다리없는 아품과 고통의 회한이 그곳 현장에 찾아오니 순간 격한 감정이 치밀어 올라왔을것이다.

이제 누구도 대신해줄수없는 불구의 아품이기에 여기서 그 아품 되새기고 다시는 울지말라고 그 전우를 다독이면서 현장을 떠나는데 내려오다가는 자기가 길어날랐든 우물을 자꾸 뒤돌아보게 되는것은 어쩔수없는 전쟁의 아품일것이다.

돌아오는길에 호이안 옛 시가지와 복권성, 관우사당등을 관광하고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다낭해변에 위치한 호텔바닷가에서 옛정취를 만끽할수 있었다

해변가 노보텔다낭호텔앞에 바다 풍경은 아름다웠다

옛날에는 청룡부대 휴양소가 있었을법한 아름다운 풍경에

바닷가에 위치하여 바다수영도 즐길수있고 호텔앞에 풀장이 큰게 있어 투숙객들이 수영을 즐기기도 하였다

호텔의 식사는 우리 입맛애 맛게 조리되어 불편함이 없었다.

호텔 숙소에 들어가니 옆에 두다리를 절단한 우태원 대의원이 옷을 모두벗고 씻으러 가는데 그 모습이 다시한번 측은해보인다.

얼마나 가슴속에 맺힌 한이 쌓였으면 그당시 길어먹든 우물을 보고도 오열하며 눈물을 쏟았을까?

이제 우리가 안고있는 숙명을 되돌릴수는 없는것이니 앞으로라도 더 건강관리 잘하고 즐겁게 살자는 다짐을 하면서 서로를 격려하는데 우태원 대의원이 낮에 찾아갔던 전술기지 흔적을 본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듯 뒤척뒤척 좀체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나역시 문득 69년도 10월 백마 도깨비19호 작전에서 적진공격중 로켙트공격을 받아 쓰러저 한눈을 잃는 전상을 당한 그당시가 회상되어 울적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 부시럭 대다가 늦게 잠이 들었다.

순례 5일

순례가 5일째 접어들어간 날, 고대 베트남의 구엔왕조 왕궁이였든 후에성을 찾아가기위해 약 3시간가량 버스로 달려갔다

가는도중 당시북부 월맹과 자유월남의 경계였든 산을 굽이굽이올라 하이난고개라는 고개에 올라보니 그곳엔 아직도 삼엄햇든 국경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어 당시에 긴장되었든 현장의 분위기를 읽을수있었다

견고한 벙커와 망루 축대등 이곳이 북위17도선 국경이었다는데 수십년이 흐른지금 그 국경을 넘어 옛 월맹땅을 들어간다니 새삼 감회가 새롭다

이제 삼엄했든 국경이 아니라 잡상인들이 물건팔기위해 소란스러울뿐 그 어디에도 군대도 없고 군인들도 없는 평화로운 관광지 모습뿐이다.

이토록 쉽게 통과할 국경이었는데 무엇때문에 그토록 치열하게 싸웠는지 모른다.

잠시 주변을 돌아보고 다시 고개를 넘어 당시 북부월맹지역 후에성을 향해 3시간 가량을 버스로 달려 역사적인 후에성에 당도하였다.

마치 북경 자금성에 온듯 외형이 비슷한데 넓은 옛 궁궐이 그래도 잘 보존되어 관람객의 눈길을 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만큼 고색창연한 이 궁궐이 1802년부터 구엔왕조가 1945년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미니전동카를 타고 궁궐 이곳저곳을 돌아보니 그 웅장한 궁궐이 보여주는 옛 베트남에 영화를 눈으로 보는듯 경이롭기 까지 하다.

그 옛날 어떻게 이렇게 웅장한 궁궐과 성을 쌓을수있었는지 인간의 힘과 기술이 어디까지였을까 궁금하기까지 하였다.

궁을 나와 다시 찾아간곳은 카이딘황제릉이었다

옛날 구엔왕조의 영화를 보는듯 왕릉이 웅장하다.

후에성 관람을 마치고 다낭으로 이동하여 시내에서 식사후 다낭의 야간 시내풍경을 관람하기위해 소위 흥등가를 방문하여 밤풍경에 시간가는줄 몰랐다.

더위가 심한 곳이라 낮에는 집안에 있다가 밤만되면 모두 쏟아저나와 밤문화를 즐긴다는 가이드 신부장 설명에 매일 후덥지근한 날씨에 시달리는 우리가 보기에도 그럴수밖에 없겠구나 생각되었다.

다낭 해변가 식당에서 삼겹살에 소주한잔씩 기울리니 며칠 순례일정에 피곤한 몸으로 비틀거리면서 몸들을 잘 가누지못하면서도 이제 돌아가는 일정이 닥아오니 그런가 말수는 더욱 많아지고 기울리는 술잔을 부딪히며 “위하여!” 외치는 목소리들이 더욱 우렁차다.

술을 잘 못하니 같이 어울리지못하고 숙소로 들어오는데 반세기전 이곳에서 청춘을 불살르며 정글을 누볐든 그 용맹이 아직은 남아있어 저렇게 입으로라도 요란스럽게 당시를 회상하면서 두팔을 흔들며 무용담에 침튀긴다.

그러나 이내 피곤한 몸들로 호텔로 들어오는 발걸음이 비틀비틀 불안한데 흐트러진 옷매무새며 저마다 반세기 세월에 찌든 모습들이 이제 안쓰럽기 까지 하다.

순례 6일

오늘은 마지막날이라 호텔에서 짐을 정리하여 나오니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설레임일까 즐거운 얼굴들로 아침인사들을 나눈다.

식사후 버스를 출발하여 베트남의 양대 신흥종교인 유명한 까이다이교사원을 찾아 관람하는데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기본이념에 따라, 예수,석가모니,마흐메드, 공자등의 성인을 한곳에 모아둔 사원이다.

다음은 다낭시청옆에 있는 전쟁기념관에 들르니 과거 베트콩들과 월맹군이 전투를 해서 승전한 기록이든가 무기등이 전시되어있는데 한국군 기갑연대 휴양소라는 글씨가 있는 사진이 보이고 그옆에 글은 읽을수없지만 우리 한국군의 만행이라도 기록한것같은 사진이 또하나 있다.

그 옆에는 유명한 벌거벗은 소녀가 뛰어오는 장면의 사진이 선명이 걸려있다.

그당시에 저들이 소지하고 사용하였든 각종무기들은 우리군같은 현대식 무기들이 아니라 원시적인 개인소지 무기들로 거대한 연합군을 상대한 그당시 월맹군들의 집요함에 놀라움을 금치못하겠다.

전쟁기념관을 관람하고 쇼핑순서로 천연건강식품을 파는곳에서 선물좀 사고 다시 커피판매장에 들려 선물용 커피를 사고 피로를 풀어주는 맛사지좀 받고 다낭공항에 도착하여 3박4일 같이한 가이드 신부장과 아쉬운 작별을 한후 귀국비행기에 오르니 5박6일간에 일정이 꿈같이 흘러간것 같았다.

후기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듣는 국내 뉴스는 메르스확산이 아직 진정이 안되어 어수선함 속에 전적지를 다녀온것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으나, 거의 반세기만에 참전했든 그 역사적인 현장을 다녀오면서 무엇이 그토록 치열하게 그당시에 서로 총을 겨누고 싸웠는지 역사를 되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을 뜻깊게 보낸것 같았다.

그곳엔 우리같이 메르스 공포도 없고 5박7일 일정동안 그렇게 무질서한듯 뒤엉키는 차량과 오토바이물결속에 접촉사고 한번 없었든게 신기하기까지 하다.

이제 그들도 옛 전쟁의 기억은 잊은채 오늘도 열심히 풍요롭게 살고자 하는 생업에 열심일뿐, 우리를 향한 적대감도 없이 오직 이나라를 찾은 관광객으로 극진히 대접할뿐이다.

옛날 참전당시에 찌는듯한 더위와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정글을 누볐든 그 열정에 그렇게 무더운 날씨도 잘견뎠으나, 이제 호텔이나 차량밖에만 나가면 후덥지근한 날씨에 땀을 비오듯 쏟아낸다.

그렇게 지독하게 연합군을 공격해대든 베트콩은 다 어디가고 그많든 군부대 군인들은 구경도 할 수 없고 자본주의의 물결이 넘치는 개발현장에 곳곳에 길을 막고 공사중인 중장비소리만 요란스럽다.

해변가 주변을 뒤덥헜든 철조망과 부대들도 간곳없고 반라체의 해수욕을 즐기는 연인들의 행복한 모습만 보이고 밤문화를 즐기는 평화로운

곳으로 변한 옛 격전지를 돌아보면서 반세기 세월이 흘러간 지금 그곳이나 우리도 자라는 우리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다시는 그런 참혹한 전쟁은 없어야 된다는 생각을 더욱 간절히 갖어보았다.

지나간 반세기전 왜 그렇게 서로 미워하면서 치열하게 싸웠는지 그런것은 깊이 생각하기 싫다.

인천공항에서 짐을 찾아 고속도로로 내려오는 관광버스에서 밤새 비행기에서 설친 잠을 자고자 피곤한 몸들로 눈을 감고 잠들을 청한다.

이 길은 우리장병들이 타국전선에서 흘린 피와 땀의 결실로 얻어진 소중한 길이다

64년부터 73년까지 우리 파월장병들이 월남전선을 다녀온 숫자는 약 32만명이다. 수많은 전우들이 전선에서 장렬히 산화하고 전상을 당해 고통스러운 평생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 장병들이 월남전을 지원하며 피를 흘림으로써 6.25전쟁시 우리나라를 도왔든 우방들을 지원하였으며,

많은 장병들이 실전을 경험함으로써 전투력이 향상되었고

주한미군의 철수를 억제하여 우리 국방을 튼튼히 하였으며,

국군 현대화 계획에 따른 자주국방의 기틀을 다졌고

참전으로 받은 장병들의 전투수당은 국내로 송금되어 경제개발기금으로 쓰였고

파월에 따른 미국의 경제원조를 이끌어 우리 경제를 일으켰고,

우리 국내업체를 월남에 진출시켜 건설,운송등 기술을 축적시켜 외화를 벌어옴은 물론 후에 중동으로 진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우리 장병의 파월 참전은 우라나라 경재부흥을 이룩하는 이루 헤아릴수없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게 된것이다.

시원하게 뻗은 고속도로를 달리며 내다본 창밖에 풍경은 너무나 활기있어보였고, 수많은 공장과 빌딩들이 우리의 번영을 상징한다.

나는 비록 전상을 입고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아품과 함께 살고있으나 결코 월남참전을 후회하지 않았다.

냉전시대에 풍전등화 같은 월남전선에 파견되어 자유월남을 지켰던 저 엄청난 고통의 세월은 나의 일생에 가장 자랑스럽고 영광스런날들이었다고 자부해본다.

상념에 사로잡혀 뒤척이는동안 어느새 충북도지부에 당도하였고 잘 다녀온 서로의 안부를 되물으며 다시 집을 향하여 돌아오면서 5박7일간의 긴 여정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한다 ....끝.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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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석님의 댓글

한창석 아이피 (220.♡.19.136) 작성일

손택수 지회장님 잘 읽어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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