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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년과 우리가 살아온70년
작성일 2015-08-15작성자 우종희조회수 353

광복70년과 우리가 살아온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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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70주년 광복절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온 70년을 회고해봅시다. 36년간이란 일제제국주의 하에서 압박과 식민정책으로 나라를 잃은 우리민족은 갖은 쓰라린 고통과 슬픔의 치욕을 어찌 말로 다하겠습니까?

 

  일본은 우리나라 침략에 만족치 않고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을 일으켜 전 동양을 차지하려는 침략전쟁을 일삼았을 뿐 아니라 태평양전쟁(1941)을 일으켜 미국(연합군)과 싸우다 1945. 8. 6 일본 히로시마(廣島)1945. 8. 9 나가사끼(長崎)에 떨어진 미국의 원자폭탄의 위력에 놀란 일본은 1945. 8. 15일에 무조건 항복을 하였으며 아울러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이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미국이 승리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해방된 것이다. 만일에 미국이 승리하지 못했다면 우리나라는 영원이 일본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1945. 8. 15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한 날인 동시에 우리나라가 해방된 날이었다. 8.15해방은 우리에게 곧 독립까지도 가져다주지는 안했다.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이북에는 소련군대가 진주하고 남쪽은 미군이 진주하여 각각 군정을 다스리기도 했다.

 

  남북은 두 세력의 대립으로 인하여 화해하지 못하고 뜻하지 않게 국토와 민족의 사상이 둘로 갈라져 대립하게 되었다. 남한의 민주진영은 UN의 협조를 얻어 전 국민의 자유의사대로 남북을 통한 총선거를 실시하여 국토를 통일하고 주권을 회복하려 하였으나 소련과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반대하였다. 이에 UN1948. 2월 가능한 지역부터 선거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1948. 5. 10 UN감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남한에서 역사적인 총선거가 단행되었다. 그 결과 국회가 소집되고 헌법이 제정되어 초대 대통령으로서 이승만박사가 취임하여 1948. 8. 15일에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발족한 대한민국은 194812월 파리에서 열린 UN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받았다.

 

  세계2차대전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세력다툼확장 또는 영향력 확대정책에 파급되었다. 세계의 냉전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대립이 확장되면서 한반도에도 두 개의 이념체제로 분단되어 남쪽은 대한민국. 북쪽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분단국가가 등장했다.

 

  남한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자본주의국가였고 북한은 소련의 후원을 받는 공산주의국가였습니다. 따라서 한반도의 분단은 민족통일의 움직임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쌍방에서 진행된 한민족들의 통일운동은 이념갈등의 직면과 세계냉정과의 중첩의 측면에서 1948년 이후 남한과 북한의 갈등은 시간이 흐를수록 첨예하게 심화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북한 김일성공산당은 소련 스타린을 수차 방문하여 북한의 주체성과 남침제안을 승인받고 지원약속과, 중공 모택동과의 공모와 지원으로 김일성이 주도한 무력적으로 1950. 6. 25 남침적화통일전쟁을 도발해왔다.

 

  김일성은 적화통일과 남침야욕에 군비확장과 전쟁준비에 몰두해왔는데 비해 남한에서는 당파싸움과 권력쟁취, 사리사욕 그리고 상류층의 호화로운 삶과 안이한 태도로 방심하고 있는 사이 불의에 침공을 당하고보니 속수무책이었다. 6. 28일 새벽 3일 만에 수도서울이 함락되고 피난민행렬을 인산인해를 이루고 비극은 시작되었다.

 

  북한공산군은 탱크와 대포 등 중무장으로 노도와 같이 침공 해 왰으나 아군은 그에 비교도 안 되는 열약한 군비로 대전하다보니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면서 수도서울이 함락되고 수원이 함락되었다. 그리고 75일 급기야 미군 1개대대 선두부대가 오산북방 죽령에서 참전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도 UN군이 지상군을 투입하여 참전했으나 전세는 불리했다. 아군은 파죽지세로 밀어닥치는 공산군에게 패배되어 대전이 함락되고 대구마저 위기에 처해있었다. 서부전선은 광주, 목포가 함락되고 동부전선은 포항까지 함락되었다. 대구마저 공산군에게 함락된다면 부산까지는 순식간에 함락될 것이며, 대한민국은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우리국군들은 사력을 다하여 불굴의 항전을 거듭하면서 싸웠다. 아군은 위기일발의 대구북방 낙동강방어선과 서쪽 창영, 마산 그리고 영천, 안강, 구룡포에 이르는 방어진을 구축하고 적의 집중공세를 격퇴하여 사수해 왔으며, 전사(戰史)상 최대의 격전지로서 피아간에 희생자도 수없이 발생했다.

 

  이러한 격전 중에 50. 9. 15 맥아더장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UN군과 한국군은 반격에 나셨다. 급기야 공산군이 퇴각되고 아군은 진격하여 9. 28 수도서울을 수복했다. 그리고 10. 1 38선을 넘어 진격하여 10. 20 평양을 점령했다. 그리고 선두부대 한국군 6사단 7연대 수색소대가 10. 26 오후2시경 평안북도 초산을 지나 압록강변 언덕에 태극기를 꽂아 세웠다. 아군이 압록강가까이 진격하여 북진통일의 과업이 눈앞에 다가왔었으나 중국만주에서 대기 중이던 중공군이 개입 반격에 나섰다. 북한공산군이 패주하여 위기상황에 이르자 중공군이 50. 10. 19 압록강을 넘어 왔다. 중공군 제13병단과 제9병단 30만명의 병력이 투입 11. 1부터 본격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인해전술로 반격해오자 전세는 다시 악화되어 51. 1. 4 서울이 다시 함락되고 1.4후퇴가 이루어 졌다.

 

  중공군이 참전함으로서 미·중 전쟁의 체제가 되었다. 북한군은 중공군사령관의 지휘하에 들어갔고, 한국군은 UN사령관인 미군사령관 지휘하에 있었다. 51. 1. 25 맥아더장군은 중국의 예안(만주)지역과 내륙지방에 대한 폭격을 주장하는 위협적인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미 트루먼대통령은 반대하였다. 3차 세계대전으로 전개시키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 후 51. 4. 11 트루먼대통령은 맥아더장군을 해임시키고 후임에는 리지웨이장군이 임명되었다. 중공군이 참전하자 한국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까하는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UN의 많은 나라들은 휴전을 제안했다. 그리고 남침전쟁을 사주한 소련도 미국에 대하여 휴전을 제안함에 따라 미국은 휴전협상에 임하고 필연적으로 추구하여 53. 7. 27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조인이 이루어지고 개전 31개월 만에 휴전이 되었다. 휴전이 되었으나 아직도 DMZ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전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휴전이후 작금에 이르기까지 북한공산당은 온갖 만행을 도발해왔습니다.

 

북한공산당의 도발사건을 간추려 본다면..

68.1 무장공비(31) 청와대습격 목적 침투.

68.10 동해안 무장공비(120) 침투.

74.8 국립극장에서 육영수여사 저격사건.

83.10 아웅산테러 사건(수행원 17명사망)

98.7 동해 무장간첩 침투.

99.6 1차 연평해전

02.6 2차 연평해전

10.3 백련도 해상에서 천안함침몰사건

10.11 연평도 포격사건

15.8.4 DMZ 내 우리지역에 목함지뢰 매설사건

그 외에도 KAL기폭파사건 등 수많은 망행을 도발해 왔으며, 핵개발 및 실험발사 등으로 주변 국가를 위협하고 호시탐탐 적화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6.25북한공산당남침전쟁의 위기상황에서 우리국군은 사력을 다하여 분투했으며, 미군을 비롯하여 참전UN군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한반도는 공산화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다시 한 번 그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민족의 해방에 결정적인 도움과 6.25전쟁의 위기상황에서 구출해준 미국을 비난하고 반미운동 등 선동하는 세력들이 누구입니까?... 좌파 및 종북세력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김일성공산당이 도발한 남침전쟁 3년간에 걸친 동족상잔의 전화(戰禍)는 남북한을 막론하고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인명손실도 600만명이라 한다. 폐허 속에서 남한의 우리세대들(해방과 6.25전쟁 세대 그리고 산업화 세대)은 전후(戰後) 재기의 역경 속에서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 산업역군으로써 대한민국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자부하고 싶습니다. 정전 후 국민소득이 87달러였으나 근간에 3만달러시대로 OECD회원국가와 경제선진대열에 섰다고 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건국을 부정하고 갈등과 분열, 증오와 대립을 조장하는 일부 좌파세력과 종북세력들이 우리사회 각 계층에 침투포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배척하는 것만이 자유대한민국의 발전과 존속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우리나라는 해마다 815일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여러 행사를 했다. 해마다 실행되는 광복절을 온 국민이 기뻐하고 축하하는 일이건만 잊어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국경일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것은 나라사랑의 뜻이 있다고 보나 태극기게양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금년에는 광복70년을 맞이하여 다채롭고 대대적인 이벤트를 실현하고 있습니다마는 그 열기가 영원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 간 우리가 살아온70년을 회상하면서 광복의 기쁨보다는 자유대한민국의 전도(前途)를 심려하는 바이다. 그리고 향후 경제성장과 더불어 확고한 안보태세를 다시 한 번 다짐하는 바입니다.

 

2015. 8. 15

70주년 광복절과 건국 67주년을 맞이하며...

백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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