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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김정일 남북정상회담으로 뒤바뀐 김경재와 박지원의 운명
작성일 2016-09-14작성자 한석범조회수 443

김대중-김정일 남북정상회담으로 뒤바뀐 김경재와 박지원의 운명

( 생략)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오히려 박지원 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과 더 가까운 사이가 된다. 그것도 지금의 사드배치와 밀접한 관계있는 대북 문제 때문이다. 김 총재는 지난 1999년 현역의원이자 DJ의 특사로 평양을 방북한 뒤 돌아와 청와대 보고에서 김정일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피력했다.

“인민을 굶겨죽이는 지도자와 이념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가 지원하는 물품이 제대로 주민들에 보급되는지 모니터링조차 할 수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김정일과의 관계는 서둘러선 안 됩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김총재의 의견을 선뜻 수용하지 않자 심지어 “이렇게 대북관계를 서두르니 대통령님이 노벨평화상에 대한 욕심 때문이라는 말이 세간에 돌지 않습니까”라고 따져묻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DJ의 명령은 간결했다.

"좋아. 지금부터 김동지는 대북문제 손떼고 여의도에서 의정활동에 전념하라고."

"알았습니다. 북한문제에 대해 손 떼겠습니다."

반면 당시 원외였던 박지원 위원장은 김총재를 대신하여 DJ의 방침에 충실하게 따르면서 측근으로 올라서 권력의 중심에 섰다. 그의 첫 작업은 남북정상회담이고, 이를 위해 현대그룹을 통해 총 4억 5천만달러의 돈을 김정을 개인계좌로 넣어주는 것이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박지원 위원장은 산업은행을 움직여 4천억원의 대출을 현대그룹에 주선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당시 “잘사는 형이 가난한 동생을 찾아가는데 빈손으로는 갈 수 없는 것 아닌가”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북한 김정일이 1998년도부터 핵개발을 본격 추진했고, 2006년도에 핵실험을 성공했기 때문에, 2000년도에 김정일 개인계좌로 들어간 4억 5천만 달러가 핵개발에 사용되었다는 의혹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박지원 위원장은 형무소 생활을 했으나 오히려 그 경력으로 햇볕정책의 후계자가 되어 야당의 실력자가 되었고, 김총재는 DJ가 주도해온 햇볕정책에서 이탈, 박근혜 대통령 특보를 거쳐, 자유총연맹 총재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 둘의 운명은 정확히 김대중 정부의 남북정상회담에서부터 갈라지게 된 것이다. 바로 이 문제로 50년 지기 김경재와 박지원이 16년이 지난 지금 또 다시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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