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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제주 최후의 폭도들(중편)
작성일 2016-12-20작성자 김철수조회수 319

제목 : 4.3 제주폭동 최후의 폭도들(중편)

[시스템클럽] 글쓴이 : 비바람 작성일 : 2016-03-28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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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궤멸하는 폭도들

 

4.3폭동이 발발하고 1년이 지난 1949년 4월경 폭도 세력은 현저히 쇠약해진 모습이었다. 이때까지 한라산에 남아있는 폭도는 대략 무장폭도가 100명에서 150명, 자의반 타의반으로 남아있는 비무장폭도가 500명에서 800명으로 추산되었다. 한때 6천명까지 이르던 폭도세력이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1948년 말까지는 폭도들과 제주도 바깥과의 연결이 되고 있었지만 지금은 육지부와 완전히 두절된 상태였다. 중산간 마을에서 식량을 보급해주던 친남로당 주민들도 해안가로 소개되는 바람에 식량 보급도 끊겨 있었다. 4월 21일에는 남로당 당수인 김용관이 사살되었고, 남로당 고위급 인사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제주인민해방군의 완전 소멸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5월 12일에는 작년에 파탄되었던 제헌선거가 실시되어 무사히 투표를 완료할 수 있었다. 작년 무효가 되었던 두 개의 선거구 투표율은 97% 정도로 호조를 보였다.

 

6월 10일에는 제주인민해방군 2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되었다. 이덕구 사살은 순전히 화북지서 문창송 경위의 공로였다. 문창송은 폭도 연대장으로 활동하던 폭도 고 모씨를 체포하여 전향시킨 다음에, 고 씨에게 이덕구 소재를 파악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고 씨가 산중에 은신해있는 이덕구 소재를 파악하자 이덕구 체포조가 긴급 출동했다. 이덕구는 작은가오리오름 부근에서 사살되어 쇠달구지에 실려 왔다. 이덕구 시신은 하루 동안 관덕정 앞에서 전시되었다. 이덕구 시신의 잠바 가슴주머니에는 숟가락이 꽂혀 있었다. 이덕구 뒤를 이어 제주인민해방군 사령관에 오른 것은 김의봉이었다.

 

김의봉은 이덕구가 사살된 후 제주인민해방군 3대 사령관에 올라 북제주군 조천면과 남제주군 사이에 위치한 ‘산란이’지경에 아지트를 두고 주로 활동했다. 김의봉은 폭도 사령관이면서 노무현 정부에서 무고한 4.3희생자로 등재시킨 인물로, 노무현 정부의 왜곡된 제주4.3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9월 16일에는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어있던 죄수들 400여 명이 탈옥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목포형무소에는 1,400명의 죄수가 수감되고 있었다. 탈옥수 대부분은 4.3폭동으로 유죄를 선고받고 수감된 장기 복역수들이었다. 이들은 간수 5명을 살해하고 무기를 뺏어 탈옥했다. 탈옥수 체포 작전은 10일만에야 끝났다. 탈옥수 413명 중 사살 298명, 체포 85명, 자수 10명, 미체포 23명이었다. 이들 탈옥수들도 제주4.3에서는 대부분 무고한 희생자로 등재되어 있는 실정이다.

 

1950년이 밝아오면서 폭동의 기세는 상당이 사그라들었다. 1월 21일자 자유신문에는 ‘아직도 소수 폭도가 한라산 골짜기에 잠복하여 출몰하고 있으나 아군의 유격전으로 거의 전멸상태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당시 폭도들의 잔존 세력은 무장 약 30명, 비무장 약 70명을 합하여 대략 100명 미만으로 추정되었다.

 

1950년 3월 22일에는 제주인민해방군 초대 사령관 김달삼이 사살되었다. 김달삼은 지하 선거 투표지 5만여 장을 가지고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했다. 여기에서 김달삼은 제주4.3 투쟁보고를 하여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고 국기훈장 2급을 수여 받았다. 김달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리고 김달삼은 황해도 강동정치학원을 수료하고 남한으로 침투하여 강원도와 경상북도 일대에서 빨치산을 지휘했다. 토벌대에 쫓겨 퇴각하던 김달삼은 월북을 기도하다 강원도 정선군 북면 반론산에서 최후를 맞았다. 김달삼을 확인하기 위해 김달삼은 목이 잘려 수송되었고, 강원도에는 ‘김달삼모가지잘린골’이라는 지명이 있다고 한다.

 

1950년 상반기에는 해병대가 진압에 투입되었다. 해병대는 한라산 수색을 벌이다가 간간이 폭도들의 아지트가 발견되면 기습공격을 벌였다. 소규모 교전으로 폭도들을 몇 명씩 사살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폭도들이 선제 기습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 소강상태가 이어지며 목숨이 끊어질 것 같았던 폭도들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6.25가 발발한 것이다. 북한 정권이 수립되면서 거의 꺼져가던 4.3폭동의 불씨를 다시 살려냈듯이, 이번에는 6.25가 죽어가던 폭도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었다. 잠들었던 폭도들이 기지개를 켜며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4. 6.25 초기의 폭도들

 

6.25가 터지자 제주인민해방군이 전열을 재정비했다. 다시 습격이 재개되었다. 6.25 발발 후 폭도들이 처음으로 습격한 곳은 1개월 후인 1950년 7월 25일 중문면 하원마을이었다. 마을 민가 99동이 화염에 휩싸였다. 폭도들을 지휘한 것은 5대 사령관 허영삼이었다.

 

한라산에 있던 폭도들은 6.25 발발 소식을 듣고 자기들끼리 자기들의 진로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일이 벌어졌다. 제주인민해방군 지도부에 있던 고승옥, 백창원, 송원병 등은 “인민군이 목포까지 왔으니 인민군이 제주도에 상륙한 이후에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에, 허영삼, 김성규 등의 소장파들은 “4.3을 일으킨 영웅적 전통을 이어받아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기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소장파 폭도들이 주동이 되어 그날 밤 쿠데타를 일으켰다. 허영삼, 김성규 등은 4대 사령관 고승옥 등 지도부 세 사람을 포박하고 인민재판을 열었다. 소장파는 “사상적으로 빈약하다. 투쟁력이 상실되었다”라는 등의 이유를 대어 세 사람을 살해하고, 허영삼이 5대 사령관에 올랐다. 7월 25일에 벌어진 중문면 하원마을 습격은 허영삼과 김성규가 주도한 첫 번째 작품이었다.

 

백창원과 송원병은 4.3희생자로 등재된 인물이다. 4.3희생자에는 이런 황당한 가짜 희생자가 많다. 자기들끼리 죽여 놓고도 군경에게 학살당했다고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1950년 7월에 들어서자 제주도의 좌익세력들은 제주읍을 비롯하여 각 면 단위로 ‘인민군지원환영회’를 조직했다. 북한인민군이 제주에 상륙할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제주인민해방군은 하원마을 습격 이후 간간이 마을과 지서를 습격하면서 우익인사를 살해하고 식량을 약탈했다. 폭도들 내부에서는 사상자와 이탈자가 발생했지만 폭도들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폭도들은 젊은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납치하여 인원을 보충했기 때문이다.

 

4.3초기부터 입산하여 공비(共匪)로 활동한 구비(舊匪)와 구별하기 위하여 나중에 폭도에 납치되어 공비가 된 사람들은 납치비(拉致匪)로 불렀다. 이 당시 제주인민해방군은 위계질서가 잡혀있는 게릴라 수준은 되지 못했고, 무질서한 폭도 수준의 패잔병이라는 뜻으로 잔비(殘匪)로 불리기도 했다.

 

1951년 1월에는 제주인민해방군의 주요 참모들이 사살되었고, 3월 8일 폭도 세력은 사령관 허영삼 휘하에 지휘부와 4대 지대가 있고 인원은 총 80여 명으로 알려졌다.

 

1950년 10월 1일부터 1951년 4월 7일 사이 진압대와 제주인민해방군 사이에는 28회의 교전이 있었고, 경찰관 17명이 피살, 부상 2명, 민간인 피살 2명, 부상 3명, 피납자 38명이 발생했다. 폭도들은 55명이 사살되고 5명이 부상을 입었다.

 

1952년 5월 제주인민해방군의 잔비는 무장 30명, 비무장 35명을 합하여 65명이었다. 총기는 30정을 보유하고, 사령관은 경찰에 사살된 허영삼의 뒤를 이어 김성규가 맡고 있었다. 6대 사령관 김성규는 중문면 색달리 출신으로, 9연대 탈영병으로 폭동에 가담해 제주인민해방군의 마지막 사령관이 되었다.

 

김성규의 제주인민해방군은 1952년 3월 12일 함덕리를 습격하여 민간인 9명을 납치하고, 외도부락에서는 식량을 약탈하고 도주했다. 9월 16일에는 숫자 미상의 폭도들이 국군과 경찰로 변장하여 제주방송국을 습격했다. 숙직 중이던 방송과장 김두규와 2명의 견습원과 급사를 납치했다. 세 사람은 살해되어 암매장된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10월 31일에는 경찰 8명이 경비 중인 서귀포 발전소를 습격하여 전소시켰다.

 

폭도들이 제주읍내 중심부에 있는 방송국까지 침입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발전소가 불에 타 전기 공급이 끊김으로서 김성규의 제주인민해방군은 한때 제주사회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김성규가 신임 사령관에 올랐을 때 그와 막연한 사이였던 권팔 등이 탄약을 숨겨오던 것이 발각되었다. 지급되는 탄약이 부족하자 권팔 등은 허영삼 사령관 시절부터 탄약을 감추어 왔었는데 김성규에게 발각된 것이다. 김성규는 권팔과 막연한 사이임에도 사정없이 권팔을 고문하자 견디다 못한 권팔은 본대에서 탈영해버렸다. 부하들에 대한 김성규의 폭행이 심해지자 부하들이 하나 둘 이탈하여 모두 11명이 권팔에게로 붙어버렸다. 김성규 파와 권팔 파는 냉전을 거듭하다가 전면전이 벌어졌다. 권팔 파는 전멸했고 김성규 파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제주인민해방군은 내부의 자중지란으로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었고, 폭도 주력이 본격적으로 와해되는 전기가 되었다.

 

5. 6.25 말기의 폭도들

 

1952년 하반기에 이르러 경찰은 잔비색출 소탕작전과 병행하여 폭도들에 대한 선전공작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산자에 대해서는 안전을 보장하고, 따뜻한 동포의 정으로서 대한다는 사항을 홍보하는 대민공작에 나섰다. 관대한 취급을 받고 가족들과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귀순자들을 홍보에 동원하기도 하고, 하산 권고문이 산중 곳곳에 게시되기도 했다.

 

귀순 폭도들이 늘어나기도 했지만 폭도들의 소규모 습격도 끊이지 않았다. 1952년 11월 20일 경의 폭도들의 숫자는 44명으로 파악되었다.

 

1953년에도 경찰들의 폭도 색출과 폭도들의 마을 습격은 빈번하게 발생했다. 1월 24일에는 중문면 중문리에 무장공비 약 20명이 침입하여 경찰과 교전 중에 경찰과 2명과 협조원 2명이 사망하였다. 중문리를 습격했던 폭도들을 추격 중인 경찰은 25일 상오 한라산 서북방 지대에서 약 30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무장공비를 발견하여, 교전 끝에 적의 아지트를 점령하고 무장공비 5명의 시체를 발견했다.

 

26일 하오에는 한라산록 붉은오름 근처에서 약 50명의 무장공비와 교전 끝에 공비 4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했다. 이외에도 M1총 2정, 동 실탄 다량, 축우 5두, 우마육 약 4두분, 식량 3표(俵), 배낭 10개, 모포 10매, 불온문서 등을 노획했다. 1월 30일에는 중문면 월평리에 무장공비 약 30명이 습격 해와 경찰이 격퇴시켰다. 3월 23일에는 조천면 교래리 밀림을 수색하던 경찰이 약 15명의 무장공비를 포착하여 치열한 교전 끝에 공비 3명 사살, 생포 1명, 그 외 무기를 노획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4.3이 발발한지 만 5년이 되는 1953년 4월경에는 한라산에 남아있는 폭도들의 숫자는 30여 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4월 15일에는 조천면 와흘리 산록 부근에서 김의봉이가 지휘하는 약 20명의 무장공비와 40분간에 걸친 치열한 교전 끝에 김의봉과 중요 간부 강봉오 등을 사살하고 무기와 문서 등을 다량 노획하는 성과를 올렸다. 김의봉은 3대 사령관을 지냈던 거물 폭도였다. 김의봉의 시체는 경찰국 뒷마당으로 운반되어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시체 복부에는 2발의 총탄이 관통되어 있었는데 차림은 상의는 한국제 군복, 하의는 일본제 군복, 내의는 미제, 신발은 일본제 군화에 면도도 하고 회중시계, 만년필, 자석 등을 소지하고 있었다.

 

5월 17일에는 애월면 납읍리 동남방 도로상에서 경찰관으로 가장한 무장공비 8명이 출현하여 남녀 2명을 납치하고 우마 8마리를 약탈하여 갔다. 5월 31일 경찰은 한라산 서부지구 북방 약 2km 지점에서 적의 본부거점을 발견하고, 김성규가 지휘하는 무장공비 20명을 포착, 치열한 공격전을 전개했다. 폭도 1명을 사살하고 피랍자 4명을 구출했다. 7월 10일에는 한라산록 남송악 서방 밀림지대에서 약 13명의 무장공비를 포착하고 공비 1명을 사살하고 무기 등을 노획하였다.

 

7월 16일에는 한림면 동명리 속칭 ‘병두선’에 약 9명으로 추산되는 무장공비가 침입하여 야간경비를 서는 주민 1명을 살해했다. 7월 21일에는 약 8명으로 추산되는 무장공비가 조천면 북촌리 동부락에 침입하여 아녀자 3명을 납치하고 식량 등을 약탈했다. 7월 26일에는 완전무장한 공비 7명이 제주시 오라리 부락에 침입하여 말과 양곡을 약탈하다가 경찰에 발각되어 한라산 쪽으로 도주했다.

 

11월 2일 경찰은 중문면 다래오름 부근에서 약 8명으로 추산되는 공비를 포착하여 2명의 공비를 사살하고 무기와 실탄 다수를 노획했다. 이것으로 1953년이 저물어가는 시점에서 한라산에 남아있는 폭도는 12명으로 줄어들었다.

 

두목 김성규를 사살하거나 생포 또는 귀순, 중간 역할로써 그 자를 사살이나 타살하였다는 확증을 경찰관에 제시, 시체 인도하였을 시는 구대(舊貸)로 금 1,000만원을 지급하겠다는 현상금이 걸렸다. 기타 구비(舊匪) 1명에 대하여서는 금 100만원을 각각 상금으로 수여할 것이며 귀순 공비들에게도 동일하게 수여하고 즉시 자유를 주겠다는 현상도 걸렸다.

 

11월 27일에는 구좌면 평대리 산간지대에 약 10명의 잔비가 출현하여 부근에서 방목하던 동네 청년 1명을 납치하고 축마 26두를 약탈하여 갔다. 뒷날에는 이를 추적한 경찰이 공비 1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했다. 오후 1시경에는 한라산 어후악 동부지구에서 약탈된 축마 25두가 발견되었다. 12월 5일에는 아라리 남방 1km 지점에 5명의 잔비가 출현하여 방목하는 소 4두와 말 3두를 약탈하고, 도남리 주민 1명을 납치하여 돌멩이로 전신을 타박하여 학살했다.

 

12월 24일에는 공비 1명이 사살되고, 12월 29일에는 여비 1명이 탈출하여 귀순하였다. 이로써 1954년이 밝아올 무렵에 한라산의 잔비는 여비 2명을 포합하여 합 6명이 전부였다. 6명의 폭도는 두 갈래로 분열되어 상호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고, 4명의 남비 중 2명은 총상을 입고 있었다.

 

1954년 2월 16일에는 1명의 여비가 탈출하여 귀순함으로서 잔여 잔비는 1명의 여비와 4명의 남비를 합하여 5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들은 연명에 급급하며 도주를 거듭했고, 다가오는 최후의 운명 앞에 이들은 인민해방군도 아닌, 항쟁투사도 아닌, 그저 생존 본능에만 충실한 절도범에 불과했다.

이들 5인방이 상당히 오랜 기간 포착되지 않자 1954년 9월 21일을 기하여 한라산이 전면 개방되었다. 4.3정부보고서에는 한라산이 개방된 이 날짜를 제주4.3의 종점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엄연히 한라산에는 5명의 무장공비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제주4.3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자료정리(2016-11-30)

대한해외참전전우회 창원시지회 사무국장

겸, 보훈지킴이 창원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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