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지부장 신문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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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0-03-29작성자 이병호조회수 666 |
<탁경률 대한민국상이군경회전북지부 지부장> 안중근 순국 100주년
전북도민일보
기사등록 : 2010-03-24 17:05:44
요즘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을 기념해 각종 기념식과 우표발행등의 정부차원의 많은 이밴트성 기념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토록 훌륭한 민족의 상징이신 안의사 유해의 거소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는지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도마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3남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6세때 김아려 규수와 결혼하였으며, 평양에서 상점을 경영하다가 일본과의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사업을 정리하고 그 자금으로 학교를 세우면서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조국의 국운이 기울어 조국에서의 활동이 힘들게 되자 그의나이 29세때 연해주로 망명하면서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안중근의사는 연해주에서 의병활동에 참가하면서 많은 공을 세웠다.
독립운동 대장과 사령관자격으로 100여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하여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고 노에프스키로 망명을 가게 되었으며, 거기서 망명투사들이 발간하는 대동공보의 탐방원으로서 많은 활약을 하게 되고 주위 동료들에게 충군애국사상을 고취시키게 된다.
그후 일본 당대최고의 실세 이토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상과 회담하기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살신성인의 거사를 결심하게 된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 기자로 가장하고 하얼빈역으로 잠입하여 기차에서 막 내리는 이토 히로부미를 3발의 총성과 함께 사살하고 대한독립을 외치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일본 감옥 수감 후 재판과정에서도 당당하고 의연하게 조선 민족의 기개를 보여 주었으며 3월 26일 형장의 이슬로 순국하게 된다.
탕 ! 탕 ! 탕 ! 이토 히로부미를 향하여 쏜 정의의 총성이었다. 이토히로부미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룬 중요한 인물 중 한명이고 또 초대 내각 총리대신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영웅이지만, 우리민족 최대의 원수였다.
안중근 의사는 괴로운 감옥생활에서도 ? 동양평화론? 이란 책을 집필하였다. 또한 그의 곧은 의지는 그를 감시하던 일본인 마저도 그를 존경하게 만들었으며, 당시 만주철도 이사였던 일본인 ?다나카 세이타로? 는 안중근의 인품과 사상에 감동을 받아 “ 일본인으로서는 이런 말을 하게 된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안중근은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개관한 안중근 기념관은 공교롭게도 당시 철권통치를 자랑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날이기도 하다. 올해로 안중근의사 서거 100주년이 되었다. “내가 죽거든 하얼빈 공원에 묻어 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거든 조국 땅에 반장(返葬)해다오.” 1910년 3월 26일 뤼순감옥 교수대 형장에서 32세 꽃다운나이에 남긴 안중근 의사의 유언이다.
IT, 조선업 세계 최강국, 국민소득은 2만달러를 돌파하고, 세계 10위의 선진국 대열을 코앞에 두고 있는 대한민국 ! 소위 역대 민주정부에서는 안의사의 유해발굴을 수수방관해오다가 5년전 통일부가 광복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중국, 일본, 북한과 유해발굴 공동 작업에 합의했었으나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다행히 이명박 정부에서 발굴작업에 착수 한것은 뒤늦긴 했으나 다행스런 일이다. 국가보훈처는 일본정부와 긴밀히 협의하여 부디 안중근의사의 소원대로 유해가 송환되어 꿈에 그리던 해방된 조국의 국립묘지에 안장될 그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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