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회복 요구 - 고엽제 미망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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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0-07-31작성자 김철수조회수 533 |
제목 : “살아 온 세월 너무 억울 ... 명예회복-살길 마련해 달라“
국가유공자로 우대하고 환자사망 때 혜택 승계토록 제도화 시급
“살아 온 세월이 너무 억울 합니다. 지금껏 흘린 눈물이 몇 동이는 족히 될 겁니다. 앞으로 살아 갈 일이 걱정이지만 지난 세월을 생각하면......”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몇 마디 속사포로 갈겨대더니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만다.
그동안 너무 냉대만 받다가 모처럼 같은 처지에서 얘기를 잘 들어줄 상대를 만났다는 동료의식 때문인지 속내를 털어 놓는다. 사실 기자는 이분들과 인터뷰 약속을 하면서 저도 여러분 남편들과 한때 베트남 전선에서 함께 생활했던 사람이라고 소개 했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됐니 어쩌니 떠들어 대지만 국가보훈 측면에서는 한마디로 ‘X같은 나라‘라고 퍼붓는 이 어머니들의 서러움과 한을 누가 풀어 줄 것인가?
고엽제후유의증 미망인회 최순남 회장과 회원들을 만나 그들의 서러운 사연을 들으면서 기자의 마음도 무척 답답하다.
20대 초반 건강한 젊은이들이 신체검사를 받고 군에 입대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거치는 코스다. 지금부터 40년전 그들은 국가의 명령에 복종해서 전투훈련을 받고 베트남전선에 뛰어든 것이다. 자유우방을 지키고 한편으론 6.25 때 참전우방들의 빚을 갚고...등 등 외교적 수사는 빼더라도 그들은 단 하나 뿐인 청춘을 담보로 쟝글을 해멨다. 생명을 위협하는 적과 독충과 싸우며 한편으론 밤잠을 설치며 고향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리는 향수병과도 싸웠다.
65년부터 73년 3월 철수할 때까지 8년여 동안 32만명이 참전했다. 그중 5천여명이 전사했다. 다행히 1년여 전쟁을 치루고 귀국해서 제대하고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열심히 살았다.
종군기간 중 그들에게 돌아 가야할 전투수당의 상당부분은 국가에서 받아 쓰고 돌려주지 않았지만 그 돈이 지지리 가난했던 이 나라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됐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고엽제환자 남편 보살피고 자식 키운 미망인 돌보는 것은 국가의 의무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군인들 가운데 병명조차 알 수 없는 희귀병에 걸려 쓰러지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근육이 소나무 껍데기 같이 말라 비틀어지고 온몸이 만신창이가 돼 수도 없이 병원을 드나들고... 치료비를 감당할 길 없어 집 팔고 땅 팔아 보태기를 적게는 5~6년, 어떤 이는 20년 이상 병마에 시달렸다. 이른바 고엽제 후유증이란 병임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물론 환자 본인의 고통은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들을 보살피고 뒷바라지 하며 자식들을 키운 부인들의 처지나 고통은 누구한테 호소할 수도 없었다.
고엽제 환자는 두 종류가 있다. 후유증은 국가유공자로 등록 돼 등급에 따라 보상과 치료를 받는다. 환자가 사망하면 보상이 유족에게 승계돼 생활에 도움을 준다. 병명도 이상한 후유의증 환자는 생존 때 치료와 증상에 따라 고도-중도-경도-등외로 구분하여 30 ~ 60만원의 지원이 따른다. 그러나 환자가 사망하면 국가유공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보상금이 끊겨 유족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의’ 한 글자가 후유의증 미망인들에겐 한 서린 웬수와 같은 글자인 셈이다.
베트남전쟁이 끝난지 40년이 다돼 간다. 고엽제로 인한 피해환자는 10만이 넘고 그중 많은 분들이 고생 고생하다 세상을 하직했다. 지금도 2만명 이상이 고통 속에서 원망의 세월을 살고 있다는 통계가 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보훈당국은 아직까지 ‘후유증’ 후유의증‘ 타령이나 하면서 한쪽은 도와주고 다른 쪽은 한시적으로 돌보다 팽개쳐 버리는 전근대적 보상정책을 답습하고 있으니 기가 막힌다고 미망인들은 하소연 한다. 호주나 미국 등 다른 나라 참전용사들은 벌써 오래전에 고엽제 보상을 받았고 국가에서도 전쟁터에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 영웅칭호를 주고 안정된 노후생활을 할만큼 대접 한다는데 우린 뭘 하는지...
이런 사실들이 후유의증 미망인들을 분노케 한다. 전국에 1만4천명이나 되는 미망인들이 있다지만 이들은 모두 삶에 지쳐있다. 오랜 병수발에 시달린 데다 남편들이 살림 다 거덜내고 가신 때문에 사는 것 자체가 버거워 단합된 힘을 모을 수도 없는 형편이다. 투병생활 초기에 주변 사람들의 욕을 먹드라도 눈딱 감고 가출이라도 했다면 이런 고생은 면했으련만 결국 인생 망치고 집 날리고 남은 건 눈물뿐 이다.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전쟁터에 나가 불치의 병을 얻은 남편이 불쌍하고 또 그런 희생자를 나라가 모른 채 할리 없다는 단순한 생각에 피하지 않고 어려움을 이기며 임종을 지킨 게 바보짓이었단 말인가? 불치환자 병수발 하랴 자식들 잘 키우랴 고생 많았다며 열녀 표창이나 장한 어머니 소리는 못 듣더라도 남편 생전에 주던 보조금 마져 끊어버리니 세상에 이런 나라가 어디 있느냐며 한숨과 원망의 세월을 살아 갈 뿐이다.
장애인-고령자- 생활보호자 보다 못한 대접, 이래도 되나?
최순남 회장은 이경옥 총무등 열성회원들과 함께 이 문제를 풀려고 백방의 노력을 다 했지만 허사였다. 서슬이 퍼랬던 군사정부 때는 어쩔 수 없었다 해도 민주화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고 한숨을 쉰다. 현 정부 들어서도 대통령께 탄원서를 쓰고 국가인권위원회를 비롯 국회, 보훈처 등등 안 가본 곳이 없다. 그러나 한결같이 형편은 딱하지만 국가유공자가 아니라서 도울 수가 없다는 대답을 듣는 게 고작이다. 형편이 딱한 줄 알면 법을 고쳐 국가유공자로 만들고 그에 상응한 대접을 미망인들에게 승계토록 해주면 될 텐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들 미망인들은 남편이 전쟁 때 받은 훈장이 있어 무공수훈자유족증도 갖고 있지만 혜택이란 게 겨우 고궁이나 박물관 무료입장 수준에 불과하다.
장관이나 국회의원 한번만 했어도 월 100만원이 넘는 큰돈을 평생 지원해 주는 대한민국이 국가의 명령을 받아 전쟁터에서 얻은 몹쓸병으로 고생고생하다 죽은 남편 뒷바라지에 눈물마를 날 없었던 미망인들을 이렇게 푸대접해도 되는거냐? 장관이나 국회의원 지낸 그들보다 어떤 면에선 우리 미망인들이 더 애국하지 않았느냐고 기자를 붙잡고 하소연 한다. 차라리 장애인이나 저소득 생활구호 대상자에게 주는 혜택이 부러울 때가 한 두번이 아니라고 들려준다.
그들과 같은 처지에서 군복무중 파월했던 기자도 만약 입장이 바뀌어 내가 환자였고 내 가족이 이런 처지라면... 하는 생각을 하니 정말 마음이 답답하기만 하다.
지나온 세월이 너무 한스럽고 바보짓이었다고 후회해 보지만 대부분 60이 넘다 보니 이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망막하다는 미망인들. 남편이 건강하게 잘나갔을 땐 큰 아파트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가정이 풍지박산이 되면서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가장 서러웠던 게 결혼을 앞두고 약혼한 딸의 아버지가 파월장병이라 싫다며 사위감 어머니가 파혼선언 할 때였다. 그날 내내 남편을 원망하며 하필이면 왜 파월장병과 결혼했는지 몹시 후회했다고 들려준다.
이들 고엽제 후유의증 미망인들의 눈물을 누가 닦아 줄 것인가? 국가를 위해 희생한 남편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얼마 남지않은 이분들의 여생을 국가에서 책임지는 방법을 찾을 수는 없는가? 천안함 46명 전사자들에게 보여준 관심과 성의의 일부만 이들에게 돌린다면 이 문제는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그리도 어려운지?
해답이 아주 간단하다면 웃을 일인가? 후유의증 환자들을 하루빨리 국가유공자로 우대하고 환자본인이 사망한 경우 생전에 받던 혜택이 미망인등 유족에게 돌아가도록 제도화하면 되리라 본다.
지난 현충일 기념식에서 이명박 대통령께서도 나라를 위해 희생한 참전용사들을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국민 앞에 약속하지 않았는가. 말로만 백번 천번 약속하면 뭘 하나. 40년 전 파월당시 대통령은 물론 국회가 만장일치로 살아만 돌아오라 그러면 모든 걸 나라가 책임지겠다고 선언했었다. 그런데도 오늘날 베트남 참전용사들은 어떤 대접을 받고 있나. 그 대표적 사례가 후유의증 미망인들에 대한 대접이 아닌가 싶다. 대통령과 보훈처 등 정부관계자, 국회에 진정 불쌍한 고엽제후유의증 미망인들을 돌볼 생각과 의지가 있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그들 미망인들 입에서 다시는 ‘*같은 대한민국’이란 비탄의 말이 나오지 않도록 국민들이 인식을 새롭게 하고, 국가차원에서 그들을 당연히 감싸주고 보살펴야 진정한 선진국이 되지 않을가?
<최 정현 기자>
그룹인터뷰 참석자
최 순남 미망인회 회장 (73세) / 남편 고 구 태웅 중위. 38년생. 십자성부대로 참전
1989년 발병 13년 투병 후 2002년 사망. 피부병 심할땐 전혀 잠을 이루지 못하고 24시간 피가 나도록 긁어댐. 당뇨에 심근경색까지 겹쳐 앓으며 나중엔 말도 못하고 대소변 받아내며 식물인간 상태로 생을 마감. 서울시내 내노라 하는 큰 아파트 큰 평수에서 잘살다 병원비 대느라 살림을 줄이고 줄여 지금은 월 15만원 내는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생활. 파월참전자 자녀라 약혼했다 파혼 당한후 결혼하지 않겠다는 남매와 어렵게 살아 가고 있다.
이 경옥 미망인회 총무 (60세) / 남편 고 최 재걸 병장. 48년생. 69년 청룡부대로 파월.
귀국후 10년지난 79년 대장암으로 첫 수술후 2~3년 주기로 대장 위장 유착수술 5회 받는 등 27년간 투병하며 갖은 고생. 임종전 1년간은 더 이상 수술 안하겠다 버티다 사망. 투병 18년후인 98년에야 고엽제피해자인줄 알게 되고 고도수당 월 40여만원씩 받은게 전부. 임종직전 그래도 적은 액수지만 수당 나올테니 마음이 좀 놓인다며 눈을 감았는데, 사망신고 한 달부터 지원이 끊겨 얼마나 울었는지 당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반문.
박 순길 미망인회 감사 (72세) / 남편 고 정 유화 중위. 35년생. 65년 맹호부대 소대장으로 파월, 소령 제대.
간암 선고받아 원자력병원에서 5년 치료 후 보훈병원으로 옮겨 3년 투병, 색전술고주파수술만 9회 받음 열 번째 수술할 때는 더 손댈 곳이 없을 정도로 비참했음. 생존시 주던 고도수당은 물론 영외수당 무공수훈자수당등 월 몇만원씩 주던 것마져 끊은 것은 말할것도 없고 사망일과 신고일에 차이가 난다며 그 차액까지 환급하라 하던 이 나라 이 정부가 너무 원망스러웠다고 하소연.
김 갑례 미망인회 회원 (71세) / 남편 고 이 윤진 상사. 32년생. 24년 군생활. 6.25참전 66년 맹호부대로 파월.
처음엔 목에 종기가 나더니 치료하면 좋아지고 또 다른 부분에 발병하기를 반복하며 지독한 소화불량으로 고생하다 84년 간암 판정. 2년간 몹시 고생하다 고엽제가 뭔지도 모르던 86년 사망해 전혀 지원 받지 못함. 6.25 및 월남전 모두 참전해 화랑무공훈장 받았고 24년간 군생활한 탓에 연금받아 겨우 생활하는 정도임. 전쟁터에 보낼때는 다 책임진다 하고 그 유족들을 이렇게 팽개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항의. 끝
大韓海外參戰戰友會 鎭海支會 055-545-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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