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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위인 세사람
작성일 2010-08-28작성자 이찬모조회수 657
초대 대통령 이승만 그가 아니었으면, 바로 그가 미국 쪽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펼치는 기회를 갖지 않았으면 우리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지 모른다. 지도자의 역량 중에서 특히 나라를 잃고 식민지 처지에 떨어져버린 조국을 건져 근대국가로 만들어가는 기틀을 마련해야 하는 지도자가 가져야 할 역량 중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은 시대를 보는 통찰력이다. 그리고 구국의 열정과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한다. 이승만은 바로 그 때! 그런 능력을 가지고 발휘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 역사의 신이 의지를 갖고 바로 그때 보낸 인물이 이승만이라고 생각한다. 이승만이 아니었으면 김일성부자가 이끄는 죽음의 공화국에 우리는 던져졌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실을 너무도 잘 아는 것이 그들이고 그래서 그들을 추종하는 세력은 60년 동안 이를 갈며, 대한민국을 태어나서는 안 되었던 나라처럼 만들려고 갖은 음모를 꾸미고 아직도 그것을 진행시키고 있다. 이승만만 아니면 자유민주주의 공화국 대한민국 같은 것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절치부심하며 원통해 하는 세력이 여전히 「촛불정국」에 얹혀 이 나라를 어떻게 해보려는 모의를 진행시키고 있다. 『왜 오늘의 행사에는 「승만 리」의 이름조차도 나오지 않는가. 나는 그것이 좀 이해할 수가 없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한국의 날」행사를 함께 진행했던 젊은 교수 한 사람이 최근에 이런 이야기를 전했다. 이 날을 주도한 한국 인 교수의 성향과 무관하지 않아서 이 행사는「민주화」이후의 한국을 중점적으로 소개한 행사가 되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한 노신사가 참가했다가 행사를 마칠 무렵 젊은 교수를 붙들고 질문을 하더라고 한다. 그는 우선 자기를 소개하면서 젊어서 현역 시절에는 상공에 종사했었노라고 했다. 그가 젊은 시절 그러니까 50년대의 어느 시기에 미국 각 연방을 대표하는 상공인들로 구성된 경제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일본의 초청을 받고 투자를 타진하기 위한 방일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은 미국에서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대대적인 기획을 하여 초청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일본에 들렀는데 어떤 연고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아주 간곡하게 일본의 일정을 마치면 한국에도 한번 들러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는 것이다. 본래의 일정에도 없었거니와 한국에 대한 관심 같은 것은 거의 백지 상태여서 전혀 내키지 않는 걸음이었지만 하루나 이틀만 연장하면 들를 수 있다는 이 요청이 하도 집요해서 마침내 한국에도 걸음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찾아온 한국에서 「승만 리」를 만났고 그가 하는 훌륭한 영어의 투자 유치가 어찌나 열정적이고 애국적이고 진지한지 당시에 함께 온 미국 상공인 전원이 반해 버렸다. 그래서 정작 일본에서 별로 성과가 없었던 투자 약속이 한국에서 거의 전원이 한건 씩 성사를 시키는 성과를 내고 돌아가게 되었다. 그 이후 자기는 한국에 대한 관심을 평생 이어 왔고 특히「승만 리」에 대해서는 후진국 정치지도자지만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정치지도자임을 확신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이 대학에서 갖는다는「한국의 날」행사를 일부러 찾아 왔는데 『왜 오늘의 행사에서는「승만 리」의 이름조차도 나오지 않는 것이냐. 나는 그것이 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노신사의 질문을 받고 40대의 젊은 한국인 교수는 무안하고 부끄러워 어물어물 변명하고 피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고백했다. <이 건국의 지도자를 보내준 神은 오늘의 이 땅을 응징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나 않을까?> 이 승만을 독재의 화신처럼 몰아서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세력에 의해서 너무 폄하 당하는, 이 건국의 지도자를 보내준 신은 오늘의 이 땅을 응징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나 않을까. 다른 것은 몰라도 그는 청렴한 거인이었다. 파란 눈의 부인 이름으로 스위스 은행에 돈을 감춰 두었느니 어쨌느니 하는 말도 그의 재임 시절에 악의적으로 퍼져 있었지만, 그는 정말 개인적으로 아무 치부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시대가 끝난 뒤에 다 드러났다. 남편이 세운 나라에서 살기를 원하며 객지를 떠돌다가 노년에 간신히 돌아올 수 있었던 프란체스카 여사가 입고 들어온 리넨 속옷이 이화장 기념관에는 전시되어 있다. 우리네 옛 여인들이 입었던 속곳과 너무도 흡사한 이 속옷에는 겉에다 손수건 만하게 덧대어 붙인 주머니가 있다. 이 주머니에 그는 한국에 돌아오면 반드시 하고 싶었던 틀니를 만들 비용을 꽁꽁 접어 넣고 들어 왔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너무도 훌륭하고 값은 싼 한국의 치과기술』의 혜택을 보았다. 의치를 해 넣고 나서 너무도 마음에 들어 한 그는 외국인 친지들이나 외교가의 사람들을 만나면 반드시 권고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치과 시술을 반드시 받으시도록 하라. 당신에게 크게 이득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임종을 맞게 되었을 때 양자인 아들 내외에게 그분은 꼭 한 가지 당부를 했다. 『마지막 순간이 오면 내게 저 의치를 반드시 끼워 달라. 그래야 저승에 가서 아버님을 만났을 때 보여드리고 자랑을 할 수 있으니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임종을 보아주는 병원에서도 난감해 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 당부만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손자들의 양말을 기워서 신겨 가며 검소한 삶을 유훈으로 남긴 시어머니 프란체스카 여사의 이야기를 그의 며느님은 지금도 눈물을 흘려가며 회고한다. 이승만을 이 땅에 보내주신 신에게 감사드린다. 그 일가족의 명복을 빕니다. 상이군경회 수원시지회 이찬모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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