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라북도 김제시 독립운동가 남촌 곽경렬 선생 묘 답사 및 Monitoring. |
---|
작성일 2017-03-31작성자 송철효조회수 346 |
■. 전라북도 김제시 독립운동가 남촌 곽경렬 선생 묘 답사 및 Monitoring.
▲. 장 소 : 全羅北道 김제시 獨立運動家 곽경렬선생 墓. ▲. 관 리 : 곽씨 종중. ▲. 번 호 : 51-1-49. ▲. 주 최 : 國家報勳處. ▲. 주 관 : 國家報勳處 알림이. ▲. 날 씨 : 맑 음. ▲. 사 진 : 첨 부. ▲. 인 원 : 1 명. ▲. 작 성 : 國家報勳處 알림이.
2017年 03月 31日 오늘은 전라북도 김제 출신(1901∼1968)독립운동 가 곽경렬 선생의 묘를 답사 하였습니다. 1915年 항일비밀결사인 광복 단에 입단하여 한훈· 류장렬 등과 함께 박곡·벌교 등지의 친일파 부호 를 숙청하였으며 오성의 일본 헌병 분견대를 습격하는 등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고, 1916年 일본경찰의 체포망을 피하여 한때 만주로 망명 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계속 활동하였으며, 1918年 친 일파 리 종국이 광복단조직을 밀고함으로써 재차 체포망이 압축되자 지하로 은신하였습니다. 1920年 전라북도 옥구군 대야면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4年 군자금모금활동 사실이 탐지되어 일 본 경찰에 붙잡혀 1926年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年을 선고받았으며, 1982年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독립투사 곽경렬은 1901年 김제군 진 봉면 남상에서 곽덕수의 3男으로 태어났습니다. 1915年 15세의 어린 나이로 박상진을 총사령으로 하는 광복회의 일원이 되었는데 이 활동 체계가 국외와 국내로 분리되면서 한훈• 류장렬과 함께 전라도 일대에 서 활동하였습니다.
하는 행형부의 요원으로 활동했으며 계속 한훈을 따라 일본 앞잡이들 을 숙청하기에 전력을 다 하였는데 멀리 금강산으로 들어가 금동평과 윤답중 등 부일분자 들을 사살하였고, 그 후 몸을 피하여 일시 만주로 망명을 하였던 것인데 그때 권총 1정을 휴대한 채 향리로 돌아왔습니 다. 그 후 1919年 03月 민족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으므로 일시 거사 를 중지하고 있다가 동년 12月 11日 전북 옥구군 대야면 소산리 김영 순의 집으로 들어가 상해임시정부로 보낼 군자금으로 당시 화폐 27원 을 받아 연락원에게 전송하였습니다.
자는 성초(聖初). 호는 송촌(松村). 1907年 의병장 민종식의 휘하 에서 활약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1920년 미국 의원단이 내한 할 때 김상옥 등의 암살단과 합류하여 모의 중 체포되어 복역하였습니다.
친일파 부호를 숙청하였으며 일본 헌병 분견대를 습격하는 등 많은 활동을 체포 당하여 모진 고문 끝에 별세하신 독립운동가 곽경렬 선생 묘를 답사하여 선생의 애국사상을 후손에 전하기 위함입니다.
1926년 전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3年의 언도(宣告)를 받게 되었고, 1929年 04月 01日 전주 감옥에서 출옥한 후로는 일제의 고문에 못 이겨 29세의 나이에 반병신이 되어 재향 영농에 치중하다 김제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다가 1968年 06月 향년 68세로 별세하였습니다. 정부에 서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2년도에 건국포장을 수여 하였습니다. ●. 게 재. 1. 國家報勳處 열린마당 參與寫眞.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