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16 새벽 첫 방송: 박종세 아나운서회고록
박종세 아나운서는 1956년 KBS에
들어 오셧습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5.16
첫방송의 주인공으로널리 알려 지셨고 그 때 상황이
부분적으로 전해 오기는 했지만, 회고록 방송, 야구
그리고 나의 삶」을 펴내시면서 상세한
내용이 소개 되었습니다.
박종세 아나운서는 경복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하셨고 KBS 중앙방송국
아나운서를 하시다가 1964년 TBC개국무렵 가셔서 중앙일보.
동양방송시절 아나운서실장과 국장급 방송주간을 하셨습니다.
1980년 방송 통폐합때 KBS에 오셔서 방송주간을 하시다가
퇴직후에는 코래드 대표이사, 아시아컴 회장등을 역임
하셨고 한국 아나운서 크럽 회장을 지내셨습니다.
1961년 5월15일 오후, 나는
야구 중계방송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宿直(숙직)을 하기 위해 남산 KBS 방송국으로
출근했다. 초여름에 접어드는 따가운 햇볕 아래서
몇 시간 동안 악을 쓰면서 중계방송을 했던 터라
온몸이 축 늘어지고, 거기다가 입술까지
터져서 기분이 아주 좋지 않았다.
나는 샛길 아래쪽에 있는 약국에서
약을 사먹고 아나운서실로 들어왔다. 나와
같은 팀인 송영규 아나운서와 저녁, 밤 방송을 마치고
새벽 1시를 넘어선 시간에 나는 숙직실로 올라갔다.
몹시 지쳐 있던 나는 몇 번을 뒤척이다가 곧 잠에 떨어졌다.
얼마를 잤을까, 우리는 숙직실로 올라 온 수위 아저씨가
소리를 질러대는 바람에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1층 현관으로 나갔더니 憲兵(헌병)들이 들어와
있었고, 그중 책임자인 듯한 大尉(대위)가 숙직 책임자를
찾는 것이었다. 그날 밤 숙직자 중에는 나이가 많은 도상보
음악PD가있었지만 방송국 직급으로는 내가 책임자인 셈이었다.
헌병 대위는 앞으로 나선 나에게 『지금 정체 불명의 군인들이
김포 방면에서 서울을 향해 진격하고 있습니다.
북괴군 같기도 하고 반란군 같기도 한데
그들이 일단 서울에 들어오면 먼저 KBS를 접수하고자
할 것입니다. 우리 헌병부대가 지키러 왔으니까 별일은 없겠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주기 바랍니다』라는 요지의 말을 건넨 후 방송국
곳곳에 헌병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이
안 됐지만 상황이 긴박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걱정에 휩싸였다.
그렇게 웅성거리며 10분쯤 지났을까,
방송국에 배치되었던 헌병들이 허둥지둥 트럭에
올라타더니 明洞(명동)쪽을 향해 도망치듯 내달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헌병들이 사라지고 채 5분도 안 지났는데
또다른 軍 트럭들이 남산 쪽에서 방송국 앞으로
들이닥치더니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들은 단숨에 방송국 담을 뛰어넘으면서
일제히 총을 쏘아댔고, 우리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정도로 겁에 질렸다. 도상보 PD와 함께 도주 군인들의
銃口(총구)가 하늘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삼태기 모양의 KBS 南山演奏所(남산연주소) 앞은 군인들의
난입과 어지러운 총소리, 총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으로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 새벽에 우리는 귀를 찢는 銃聲(총성) 속에서
금방이라도 온몸이 벌집이 되는 것 같은 공포감으로
꼼짝도 하지 못하고 현관 앞 큰 유리문 앞에 몰려 있었다. 그때
도상보 PD가 자기를 따르라면서 뛰기 시작했다. 도상보 PD는 우리들 중
나이가 가장 많았고, 6·25 때 수색중대장으로 복무를 했다고 해서
「도 대위」라는 별명을 가진 분이었다.
우리는 그를 따라 1층 아나운서실을 지나,
한 번 꺾인 벽으로 막혀 있는 報道室(보도실)로 뛰어들어 갔다.
보도실로 우르르 밀려든 우리는 다시 방 한쪽 구석에 칸을 막아 만든
텔레타이프(Teletype)실 문을 열고 그 안으로 숨어들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데 앞장을 섰던 도상보 PD는 거기도
안심이 안 되는지 잠시 바깥 동정을 살핀 후 우리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창문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 순간
창 밖에서 『손들어!』하는 고함소리가들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우리는 다시 극도의 공포에 휩싸여 텔레타이프 뒤의
그 좁은공간으로 들어가 웅크리고 앉았다.
언뜻 6·25 전쟁 당시 拉致(납치)당한
윤영노, 전인국 등 선배 아나운서들의 이름이 떠올랐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나는 아나운서라는 흔적을 없애기 위해
부랴부랴 신분증, 출입증, 방송메모 등이 들어 있는 양복
상의를 벗어 둘둘 말아서 창문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때 누군가가 텔레타이프실 문을 두드렸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바짝 엎드렸다. 그 사람은 반응이 없자
문을 몇 번 흔들어 잠긴 것을 확인하더니, 『거기 朴鍾世 아나운서
있습니까?』하고 나를 찾았다. 순간 나는 어떤 안도감을 느꼈다.
「거기 朴鍾世 있어? 나와!」 했으면 나는 아마 자지러졌을
것이다. 그런데 나를 찾는 목소리는 危害感(위해감)이
느껴지지 않았고, 정중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원로방송인 황우겸, 전영우, 김명희님과 함께
아무리 비상 상황이라 해도 말을 전문으로 하는
아나운서가 그것을 구별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나는
텔레타이프 뒤에서 나와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공수부대
복장의 소령 한 사람과 대위 두 사람이 서 있었는데,
소령은 나를 알아보는 눈치였다.
그는 『같이 가시지요』 하면서 앞장을
섰는데, 나는 괜히 졸아들어서 우물거리고 서 있었다.
그때 대위 두 사람이 「앞으로 따라가라」는 턱짓을 하며
기관단총으로 내 등을 쿡쿡 찔렀다. 나는 그들과 함께 보도실을
나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軍帽(군모)의 별 두 개가
유난히 선명한 軍 將星(장성) 앞에 세워졌다.
그 장성은 대뜸 『朴鍾世 아나운서입니까?
나 朴正熙라고 하오』 하면서 악수를 청했다.
나는 잠시 朴正熙 장군의 손을 잡았다 놓았다.
『朴장군이 직접 방송하시죠』 朴장군은 차분한 목소리로
『지금 나라가 너무나 어지럽소. 학생들이 판문점에 가서 북한
학생들과 만나겠다고 하지를 않나, 국회는 매일같이
싸움질만 하고,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소.
그래서 累卵(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우리 軍이 일어섰소. 오전 5시 정각에 이것을 방송해 줘야겠소』
하면서 傳單(전단) 한 장을 내미는 것이었다. 나는 전단을 받아 재빨리
훑어보았다. 그것은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서…」로 앞부분이
시작되는 革命公約(혁명공약)이었다.
혁명공약은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로 마무리돼 있었다. 북한군이나, 여순(14연대)반란 사건 같은
정체불명의 군부대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면서 나는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다. 혁명공약이 적힌 인쇄물을 내게 건넨 뒤로도 朴正熙 장군은,
軍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을 몇마디 더 보태면서 나를 설득
했는데, 그런 그의 모습은 진지했고, 말에는 條理(조리)가 있었다.
그런 긴박함 속에서도, 위험에 처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사였을까, 朴正熙라는 「朴」字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종씨시군요」하는 말을 목구멍에서 억지로
참았다. 그러다 보니 떨리는 가슴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작은 여유도 생겼다.
나는 용기를 내, 『朴장군님이 직접 방송하시고
제가 소개 멘트를 해 드리면 안 될까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朴장군은 『朴아나운서가 하시오!』라고 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도 단호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사라진 엔지니어를
찾아라 곧이어 내가 십년 감수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때 시각이 오전 4시 40분으로,
오전 5시까지는 단 20분밖에 남아 있지
않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엔지니어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옆에 서 있던 李錫濟(이석제) 중령
(뒤에 총무처 장관·감사원장)에게 『저 혼자서 방송을 할 수
없습니다』라며 엔지니어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때부터 방송국
건물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방송국에 들어와 있던 혁명군들은
"엔지니어를 찾으라"는 긴급명령이 떨어지자 건물의
구석구석, 하다못해 공개방송실 의자
밑까지 뒤지며 난리를 피웠다.
그러나 엔지니어는 방송국內의 어디에도 없었다.
그날의 담당 엔지니어인 한영식씨와 임시현씨는 우리가
아래층에서 혁명군의 亂入(난입)으로 떨고 있을 때, 2층의
主조종실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방송국
뒷담을 넘어 명동 쪽으로 피신했던 것이다.
방송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기술담당 직원을
찾을 수 없게 되자 군인들은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큰 키에 우락부락한 용모를 가진 중령 한 사람이
『아나운서가 하면 다 되는 것 아냐? 5시에 방송 안 나가면
당신 죽을 줄 알아!』하면서 「철커덕」 권총을
장전해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나는 나중에야 그가 玉昌鎬(옥창호) 중령인
것을 알았다. 그는 그 큰 군홧발로 복도를 쾅쾅 울리며
윽박질렀고, 나는 현기증이 일어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 현장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동창 金基柱(김기주) 기자 (MBC 전무 역임)는
훗날, 그때 내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지는 것을 보고
자기까지 조마조마했었노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전 5시 5분 전, 시간이 그야말로 5분밖에
남지 않은 그 절박한 순간에 갑자기 아래층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났다. 엔지니어가 돌아온 것이다. 헐레벌떡 2층으로 뛰어
올라오는 두 엔지니어를 보는 순간, 나는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내 얼굴에 핏기가 다시 올라오는 것을 스스로도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의 손을 맞잡고「방송 상태」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지체 없이 메인 키를 올렸고,
남산연주소와 延禧送信所(연희송신소)까지
방송되는 打令(타령)이 남산연주소 전체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훗날 5·16 첫 방송 이야기를 쓴 혁명 주체 한 사람이,
이 타령이 울려 퍼진 상황을 묘사하면서 「朴鍾世를 잡아와
방송을 시켰더니 덜덜 떨면서 애국가를 틀어야 할 순간에
민요를 틀었다」고 써서 쓴웃음을 지은 일이 있다.
청취자를 안심시키려 菜根潭을 방송 그 무렵에는
작은 스튜디오에서 아나운서 혼자 器機(기기)를 조작하면서
뉴스와 음악 등을 방송했는데, 그날 5·16 혁명을 알리는 첫 방송은
7호 스튜디오로 불리는 작은 방송실에서, 내가 뉴스를 진행하는
메인 마이크 앞에 앉고 송영규 아나운서가 보조 자리에서
턴 테이블에 행진곡을 걸어놓고 기계조작을 해주었다.
내 앞에는 朴正熙 장군이 꼿꼿이 서서 방송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로는 金東河(김동하·前 마사회장) 장군,
李周一(이주일·육군 대장·감사원장 역임) 장군과 함께 金鍾泌(김종필),
李錫濟 중령이 서 있었다. 정문순 중령, 이형주 중령은 내 뒤의 작은
의자에 앉아 권총을 빼든 채 나를 감시했다. 타령에 이어 방송이
시작되어 애국가가 나가고, 그리고 5시 正刻(정각)
행진곡과 함께 5·16 혁명 방송이 시작됐다.
나는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서…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육군 중장 張都暎』으로 끝나는 혁명공약
방송을 같은 자리에서 여러 차례 반복했다. 일단 성공적으로
첫 방송을 내보낸 뒤, 나는 李錫濟 중령과 의논해
혁명공약 방송 사이사이에 다른 프로그램을
넣어 가면서 방송을 계속했다.
李중령이 『청취자들을 너무 놀라게 하는 것은
좋지 않겠다』고 해서 菜根譚(채근담) 등으로 엮은
「마음의 샘터」라는10분짜리 프로그램을 그 긴박함
속에서도 천연덕스럽게 방송했다.
오전 7시에는 「미국의 소리(VOA)」 방송도
그대로 받아서 내보냈다. 그때 「미국의 소리」에
가 있던 장기범 선배의 방송에서 혁명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대목이 나오자 즉각 중단했다.
사복에 카빈 총을 들고 지휘하던 金鍾泌 당시
金鍾泌 중령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지 않은 검정 양복 차림이었는데, 한쪽 머리칼이
축 처져 내려온 데다가 손에 카빈총을 들고 군인들을
지휘하는 모습이 마치 영화에서 본 프랑스
레지스탕스 지도자 같았다.
누군가가 金중령이 서울大 사대를 다녔다는
귀띔을 해주어서 친근감이 느껴지던 참인데, 마침 그가
내게로 다가왔다. 오전 4시 40분경이었다. 나는 그에게 『지금
이곳 남산 KBS 방송국만 접수했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이곳은 연주소이고 방송이 발사되는 곳은
「延禧送信所」라는 곳이다.
그곳에서 자키(콘센트) 하나를 빼든가 스위치를
내리면 방송은 되지 않는다. 그곳을 빨리 챙겨야 한다』는
요지의 말을 전했다. 金중령은 『그런 절차가 있느냐』며 깜짝
놀랐고, 서둘러 송신소로 군인들을 보내느라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그런데 延禧洞(연희동)에 있는 송신소로 향한 군인들이 阿峴洞(아현동)
언덕을 넘어 신촌역 부근을 지날 때 5·16 첫 방송은 전파를 탔다.
연희송신소에 군인들이 도착하지 않았는데도
혁명방송이 탈 없이 나간 것이다.
그날 연희송신소 담당 엔지니어는 서울大 동문으로
나와 인연이 많은 鄭溶文(정용문·前 한솔PCS 사장)씨였다.
그는 새벽에 방송 스위치를 올리고 나서 잠시 혼란에 빠졌다고 한다.
방송이 나오는데 이상했던 것이었다. 난데없이 행진곡이 울려 퍼지고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으로 시작되는 방송이 나오자, 그는
뭔가 잘못 되었다는 판단이 들어 남산연주소로
연락을 해볼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시 들어보니 방송 아나운서는
전날부터 같이 숙직을 하는 「朴鍾世」가 분명하지
않은가. 다른 사람도 아닌 朴鍾世가 방송을 하는데, 스위치를
내릴 수도 없어서 그대로 놔두었다는 것이다. 만약 생판 모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면 방송은 중단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가끔 鄭사장을 만나 식사를 하면서
그때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다.
혁명군은 방송국 접수 계획을 세우면서
처음에는 혁명공약을 방송할 아나운서를 외부에서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일로 여러 의견이
오간 끝에 청취하는 국민들이 놀라지 않도록 當直(당직) 아나운서를
통해 자연스럽게 방송을 하자는 쪽이 우세해 결국
내가 마이크를 잡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방송국 당직을 택한 지혜가
혁명방송의 성공을 가져온 셈이 됐다. 엔지니어들,
달아나서 파출소에 신고 그 당시 나는, 나에게 식은땀을
줄줄 흐르게 했던 한영식, 임시현 두 엔지니어가 어떻게
극적으로 방송국에 나타나게 됐는지 궁금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두 사람은 2층
主조정실에서 군인들이 들이닥치는 것을 보고
바로 뒷담을 넘어 중구 筆洞(필동) 쪽으로 해서 명동까지
내달려 파출소에 신고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찰관들은
「지금 KBS에 군인들이 쳐들어 와 총을 쏘아대고 있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무슨 소릴 하느냐』며
도무지 믿어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방송시간이 다가오자 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