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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곽을 답사한 후 ! 1,2,3,4.
작성일 2011-06-03작성자 송철효조회수 608


* 서울 성곽을 답사한 후 ! 1,2,3,4.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1. 槪 要. ⑴, ⑵, ⑶, ⑷, ⑸, ⑹, ⑺, ⑻, ⑼, ⑽.  

⑴. 日 時 : 2011年 05月 28日 15:00~17:00.

⑵. 場 所 : 서울 城郭.

⑶. 主 催 : 文化財廳.

⑷. 主 管 : 韓國 文化財 保護財團.

⑸. 目 的 : 올바른 국가관 정립을 위한 現場踏査.

⑹. 人 員 : 74名.

⑺. 氣 候 : 무더운 날씨.

⑻. 寫 眞 : 添附 하였습니다.

⑼. 作 成 : 상이군경회 회원 宋 哲 孝.

⑽. 槪 括 : ①, ②, ③. 

①. 2011年 05月 28日 오늘은 文化財廳 文化財지킴이 能力向上을 위하여 朝鮮王朝가 首都 한양을 防禦하기 위해 쌓은 서울 종로구 누상동에 位置한 서울 城郭을 踏査하였습니다. 史蹟 第10號로 指定되었으며 둘레는 약 17㎞이고 朝鮮王朝는 1394年 11月 한양으로 遷都하여 宮闕➝宗廟➝사직을 建設하기 始作해서 다음 해인 1395年 9月까지 끝내고 首都를 防禦➝守護하기 위해 城郭을 쌓았습니다. 工事는 1396年(太祖 5) 1월부터 始作하여 49일간 持續되었으며 이때 各 道로부터 動員된 인부는 11萬 8,000餘 名으로 細密한 計劃을 세워 工事를 進行했고 工事의 完璧을 기하기 위하여 二重 三重의 責任者와 監督者를 두어 그들에게 責任을 묻기 위한 方法으로 城壁 바깥쪽 돌에 監督者의 出身地와 姓名 等을 새기게 했습니다. 지금도 南山 東쪽의 城壁에는 그 痕迹이 남아 있으며 城郭은 人工을 加하지 않은 自然石으로 쌓았는데 基礎石이 長大하고 城壁이 수직 形이며 돌과 돌 사이에 작은 돌로 메꾸는 等 築城方法이 未洽했습니다. 

②. 城의 基礎部分이 높고 험한 곳은 石城으로 하여 높이 15척 總 延長 1萬 9,200척이었고 낮고 평탄한 곳은 土城으로 築造했는데 아랫단의 너비가 24척이며 윗 단의 너비가 18척이고 높이가 25척으로 總 延長 4萬 300척 이었습니다. 이 工事는 짧은 期間에 17㎞ 以上의 長城을 築造했기 때문에 堅固하지 못해서 1396年 8月부터 慶尙道➝全羅道➝江原道의 百姓 7萬 9,400名을 徵發하여 2차 工事를했습니다. 2차 工事는 東大門 부근 等 完成하지 못했던 곳의 完築과 여름철 장마로 무너진 곳의 改築 그리고 낮은 城의 補修 城門의 樓閣을 짓는 일 等에 主力했습니다. 아울러 都城의 8個 城門도 이때 만들어 1차 工事에 대한 補修➝完成을 위한 工事였다고 볼 수 있으며 이 工事는 그해 9월 24일 終了되었지만 그 後에도 軍人➝僧侶 等에 의한 部分的인 補修는 繼續되었으나 서울 城郭이 都城으로서의 面貌를 갖추게 된 것은 1422年(世宗 4)이였습니다.  

③. 서울 城郭의 特徵으로는 첫째 都城을 모두 돌로 쌓았고, 둘째 성가퀴(女墻)를 높게 하여 防禦에 萬全을 기했고, 셋째 수문(水門)을 增設했으며, 넷째 城門을 改修하거나 옮겨서 設置하여 都城 出入門으로서의 面貌를 갖추었고, 다섯째 城 周圍에 큰 길은 巡察과 有事時를 對備하여 必要한 措置였으며, 여섯째 城 周圍를 擴張했습니다. 都城 門으로는 崇禮門(南大門)➝흥인지문(東大門)➝敦義門(西大門)➝肅淸門➝彰義門➝惠化門➝光熙門➝昭德門의 이른바 8大門이 있었습니다. 都城을 補修하는 責任官廳으로는 성문도감(城門都監)을 설치했고 都城의 守護와 警備를 위한 機構로 兵曹 例下에 都城衛➝都城警守所 等이 있었습니다.  

2. 內 容 : ⑴, ⑵, ⑶, ⑷.  

⑴. 1395年(太祖 4) 서울을 防衛하기 위한 都城을 쌓으려고 都城築造都監을 設置하고 鄭道傳에게 命하여 성터의 조사하여 測定을 實施하였습니다. 1396年(太祖 5) 陰曆 01月 09日 起工式을 올리고 春秋 2回에 걸쳐 全國에서 徵發한 장정 19萬 7千 4百餘 名을 動員하여 98日 만에 북악산➝낙산➝南山➝仁王山을 따라 城의 築造를 完了하였습니다. 城의 길이는 9千 9百 70步(1步는 6자)이며 높이는 40자 2치로 城을 97구(區)로 나누어 區마다 千字文에 따른 番號를 하늘 천(天) 자부터 조상할 조(弔) 자까지 붙였습니다. 城이 낙성된 後에는 排水地로 5칸수문(五間水門)➝2칸수문 等을 만드는 한편 城郭의 關門으로 肅淸門(肅靖門,北大門)➝興仁門(東大門)➝敦義門(西大門)➝崇禮門(南大門)의 4大門과 弘化門(東小門)➝光熙門(수구문)➝彰義門➝昭德門(西小門) 4小門을 합해 8大門이었습니다. 

⑵. 1422年(世宗 4年)에 흙으로 쌓은 곳을 모두 돌로 다시 쌓는 等 奉足과 雜色 32萬 2千 4百 名을 動員하여 38日 만에 大大的으로 城郭을 고쳤습니다. 1451年(文宗 1年)에도 城을 고쳤지만 壬辰倭亂 때 一部가 破壞되어 1616年(光海君 8年)에 改修하였으나 丙子胡亂 때 다시 부서졌으며 丙子胡亂 때 淸나라와 맺은 條約 中에 城壁을 쌓지 않고 補修도 하지 않는다는 條項이 있어 부서진 채로 放置되다가 1704年(肅宗 30年) 이조판서 李儒의 主張으로 五軍門의 장정을 動員하여 1711年(肅宗 37年)까지 修築하였으며 1743年(英祖 19年)에 다시 고쳤습니다. 그밖에도 孝宗➝玄宗➝英祖➝純祖 時代에 部分的인 改修를 했으나 現在 서울 城郭은 대체로 太祖➝世祖➝肅宗 때의 것입니다.

⑶. 日帝强占期의 都市計劃과 韓國戰爭으로 城門과 城壁이 많이 破壞되어 지금은 삼청동➝성북동➝장충동 一帶에 城壁이 남아 있고 흥인지문➝崇禮門➝숙정문➝弘化門이 남아 있습니다. 西大門과 청량리 사이에 전차를 부설하면서 西大門과 東大門의 일부를 헐어내었고 光化門과 용산 사이에 전차를 부설하면서 崇禮門 부근을 헐어내었습니다. 日帝强占期에는 山城을 除外한 平地에 있던 城郭은 모두 헐리어 었습니다. 서울 城郭 探訪路가 정해진 것은 없으나 4코스로 나뉘어 북악산코스(惠化門~彰義門), 인왕산코스(彰義門~崇禮門), 남산코스(崇禮門~장충체육관), 낙산코스(장충체육관~惠化門)로 나뉘어있습니다. 

④. 女墻은 城壁 위에 일정한 間隔을 두고 設置한 構造物로 敵의 화살이나 총알로부터 몸을 保護하는 同時에 攻擊이 可能한 구조로 총구 혹은 총안과 타구를 갖춘 높이가 낮은 담장을 말합니다. 여담/여첩(女堞)/ 여원(女垣)/ 치첩/ 타/ 성각휘/ 성가퀴 / 살받이터 等으로도 불리며 女墻의 使用 時期는 한국고대의 성곽에서 고구려 尉那巖城, 遼東城塚 等에서 이 形態가 있어 初期부터 사용되었다고 여겨지나 朝鮮時代 城郭에서 이러한 形態의 典型的인 모습을 確認할 수 있는데 이때 修築되거나 初築된 南漢山城, 서울 城郭, 수원화성 等이 城壁위에 女墻을 갖춘 城郭이며 女墻은 形態에 따라 平女墻과, 凸形女墻, 半圓形女墻 等으로 區分되지요. 이중 平女墻은 타와 타 사이에 양쪽에 傾斜를 주어 左右로 사경을 確保한 타구를 設置하고 正面에서 볼 때 長方形을 이루고 代表的인 예는 南漢山城의 女墻으로 모두 平女墻입니다. 다음 凸형여장은 平女墻의 形態에서 타구를 두 단 접어 만든 形態입니다. 이 形態는 수원화성의 장안문 甕城이고 半圓形 女墻은 타를 半圓形으로 連續하여 붙여 놓은 形態와 單獨으로 設置한 形態입니다. 타의 中心과 左右에는 各各 遠銃眼과 近銃眼을 설치하여 놓았으며 代表的인 예는 수원화성의 水門과 暗門 弩臺 等에서 部分的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女墻의 경우 城壁의 上壇에 眉石을 設置하고 女墻을 쌓음. 『화성성역의퀘(華城城域儀軌)』에서는 眉石은 城壁에서 3치 정도 밖으로 돌출하도록 하였는데 體 城壁 맨 윗 단의 높이를 일정하게 맞추는 要素가 包含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나 南漢山城의 경우 이러한 眉石이 發見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築城時 眉石을 設置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3. 結 論 : ⑴, ⑵, ⑶, ⑷. 

⑴. 서울 누상동에 位置한 史蹟 第10號로 指定되었으며 太祖 李成桂가 한양 遷都를 위하여 一次的으로 宮闕과 宗廟를 먼저 지은 다음에 1395년(太祖 4) 9월 都城築造都監을 設置하고 鄭道傳에게 命하여 성터를 測定 調査하게 하였습니다. 鄭道傳은 백악산➝仁王山➝南山➝낙산에 올라 實測하여 이 네 山을 連結하는 성터를 決定하였고 工事는 이듬해 정월부터 全國에서 인부 11萬 8千餘 名이 動員되어 各 工事區間에 判事➝副判事➝사➝부사➝判官 等 12名을 任命하고 工事를 督勵하여 堅固하게 築城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城壁에는 官職과 군명을 새겨 責任을 分明하게 하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그 痕迹이 남아 있습니다. 石材는 自然石을 다듬어 쌓되 基礎石은 길고 큰 돌을 수직으로 쌓았으며 平地는 흙으로 쌓았습니다. 이 해 가을에는 8萬 名의 人員을 動員하여 土城部分을 石築으로 고치고 4大門과 4小門을 完成하였습니다. 4大門은 東쪽의 흥인지문(東大門), 西쪽의 敦義門, 南쪽의 崇禮門(南大門), 北쪽의 肅淸門(肅靖門)을 말하고, 4小門은 東北의 弘化門, 東南의 光熙門, 西北의 彰義門, 西南의 昭德門을 말합니다. 

⑵. 世宗이 城郭에 대한 補修 計劃을 세우고 1422년(世宗 4) 土築 部分을 모두 石築으로 높여 쌓고 石材를 略 2:1 길이 비율의 長方形으로 다듬어 쌓았으며 女墻도 쌓았고 水門도 2個 더 만들었습니다. 1426년 修城禁火都監을 두고 城門과 城壁을 保護하게 하였고 1479년(成宗 10) 南大門을 重修하였으며 1451年(文宗 1) 1月부터 京畿➝충청의 水軍 3,000名을 動員하여 城壁을 修築 1592年(宣祖 25) 壬辰倭亂이 일어나 右議政 李陽元을 유도대장에 任命하여 都城을 守備하게 하고 金命元을 都元帥로 삼아 漢江을 지키도록 하였으나 對敵이 不可能하여 結局 王을 비롯한 조정 臣僚들은 首都 防禦에 失敗하여 서울을 버리고 北으로 避亂하였고 5월 2일 서울을 점령한 倭軍은 城郭에 矮陋를 쌓고 根據地로 삼았습니다. 이듬해에 서울이 수복되자 矮陋를 撤去하고 그 돌로 다시 修築하였으며 그 後 丙子胡亂 때도 首都를 지키지 못하고 城을 버리고 避亂함으로써 이 城郭은 敵의 根據地로 利用되고 말았습니다. 두 번의 戰爭이 끝난 後 1704年(肅宗 30)에 大大的인 補修工事를 하였는데 3月부터 略 5年에 걸쳐 오군영에 分擔시켜 둘레 9,975步, 성첩 7,081個의 修築工事를 하였으며 1743年(英祖 19)에는 部分 補修를 하였고 성첩도 회분으로 端裝하였으며 1869年(高宗 6) 東大門을 改築하였습니다. 이처럼 서울 城郭은 太祖 때 創築되어 世宗 때 改築되고 肅宗 때의 修築을 거쳐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⑶. 日帝强占期인 1915年 日帝는 近代都市로의 發展이라는 名分 아래 京城 市 區域 改修計劃을 세워 城門과 城壁을 무너뜨려 現在 삼청동➝장충동 一帶에 城壁이 남아 있고 흥인지문➝崇禮門➝肅淸門(肅靖門)➝光熙門➝彰義門 等의 城門과 暗門➝水門➝女墻➝甕城 等의 防禦施設이 一部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나 朝鮮時代의 太祖➝世宗➝肅宗으로 이어지는 築城의 變化過程과 歷史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資料입니다. 光復 後 1963年에 仁王山 方面과 北韓山의 石築을 補修하였으며 1972年과 1976年에 部分 補修하였습니다. 이번 踏査는 그동안 모르고 지내왔던 서울 城郭을 直接踏査를 하게 되어 무척 보람이 있었습니다. 

⑷. 太祖 때의 城郭은 1척 程度의 다듬어지지 않은 네모 모양의 작은 돌들을 不規則하게 쌓았으며 壁面은 수직인 狀態로 만들어졌고 世宗 때 築造된 部分은 2x3척의 긴 네모 모양의 다듬은 돌로 이루어졌는데 아래 部分은 比較的 큰 돌로 그리고 위 部分은 작은 돌로 쌓았습니다. 이 때 城壁의 中央이 밖으로 若干 튀어나와 있으며 肅宗 때의 城郭은 가로 세로 2척 크기의 正方形 모양의 돌들을 정연하게 쌓아 간격도 一定하고 壁面도 수직을 維持하고 있습니다. 1907年 南大門 周邊을 始作으로 撤去되기 始作한 서울 城郭은 1975年의 調査에 의하면 都城의 總 延長은 18,127m 이중 6,703m는 完全히 滅失된 狀態였고 11,424m가 毁損된 狀態로 남아있는 것으로 되어있으며 大韓帝國末期에서 日帝强占期 전차가 다니기 위해 도로를 잘려지고 光復 後 混亂期에 또 다시 심하게 毁損된 서울 城郭은 1975年부터 1981年까지 7個 區域으로 나누어 復元工事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南大門 附近에서 西大門 一帶에 이르는 區間과 光熙門에서 東大門까지 平地에 세워졌던 城郭의 自取인 元來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 感謝 합니다 ! 2011年 05月 31日 상이군경회 회원 宋 哲 孝(珍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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