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서울特別市 西大門刑務所 歷史觀 觀覽 및 踏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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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2-03-28작성자 송철효조회수 491 |
[15]■. 서울特別市 西大門刑務所 歷史觀 觀覽 및 踏査!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 槪 要. ▲. 2012年 03月 21日 오늘은 獨立記念館 現地 踏査敎育時間으로 舊 서울 拘置所(史蹟 第324號)인 日帝强占期의 名稱으로 서울特別市 西大門區 峴底洞 101番地(서울 西大門區 義州路 247) 西大門區 都市 管理工團에서 管理中인 垈地 8838坪/建築面積 3346.89㎡로 서울特別市 西大門刑務所歷史觀 觀覽 및 踏査를 하였습니다. 서울特別市 西大門區 義州路 247(峴底洞 101番地)에 位置한 西大門刑務所는 大韓帝國 末에 日帝의 强壓으로 監獄이 지어져 80餘 年 동안 우리 近 . 現代史 激動期의 受難과 民族의 恨이 서려 있는 歷史의 現場이자 우리 民族의 抗日 獨立運動에 대한 日帝의 代表的인 彈壓機關이었습니다. 日帝는 우리나라를 强制 占領하고 이 땅을 발판 삼아 大陸으로 侵略하려는 野慾을 本格的으로 全開하면서 그들의 侵略에 抗拒하는 수많은 愛國志士들을 投獄하기 위한 監獄의 必要性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 內 容. ▲. 日 字 : 2012年 03月 21日. ▲. 場 所 : 西大門刑務所歷史觀. ▲. 主 催 : 獨立記念館. ▲. 主 管 : 獨立記念館. ▲. 目 的 : 獨立記念館 顯忠施設 解說士 現場敎育.▲. 人 員 : 40名. ▲. 寫 眞 : 添附 하였습니다. ▲. 槪 說. ▲. 2012年 03月 21日 오늘은 大韓帝國時代에 自主獨立의 象徵으로 建立한 獨立門 近處에 1907年부터 大規模로 監獄을 지었습니다. 이 監獄은 日本人의 設計로 當時 貨幣 略 5萬圓을 들여 지었고 480坪 規模의 監房과 80坪 程度의 附屬 施設로 受容人員은 500餘 名 程度였습니다. 그때 全國 8個 監獄의 總 受用人員이 300餘名인 것과 比較하면 大規模의 監獄이었습니다. 1908年 10月 21日에 京城監獄이란 이름으로 門을 연 뒤 日帝에게 우리의 國權이 빼앗기자 이에 抗拒하는 民族 獨立運動이 全國에서 巨勢게 일어나고 日帝는 수많은 우리의 愛國志士들을 逮捕한 뒤 投獄하였습니다. 收容人員이 增加하자 그들은 麻浦 孔德洞에 또 다른 監獄을 지었고 이 때문에 1912年 09月 03日에 西大門監獄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23年 05월 05일에 西大門刑務所로 그 이름이 다시 바뀌어 1945年 08月 15日에 光復을 맞기까지 수많은 愛國志士들이 投獄되어 拷問을 받으며 處刑되거나 獄死했던 惡名 높은 곳으로 1945年 11月 21日에 서울刑務所로 바뀌고 1961年 12月 23日에 서울矯導所로 1967年 07月 07日에 서울拘置所로 바뀐 뒤 1987年 11月 15日에 서울拘置所가 京畿道 醫王市로 옮겨가기까지 이름의 變化만큼이나 많은 民族 受難의 歷史를 간직한 채 1992年 08月 15日에 西大門獨立公園으로 開園하였습니다. ▲. 國權回復을 위해 獻身한 殉國先烈의 獨立精神과 犧牲精神을 後世에 길이 傳하고 先烈의 얼과 偉勳을 기리기 위해 制定한 法定記念日로 1939年 11月 21日 韓國 獨立運動의 구심체였던 大韓民國臨時政府 臨時議政院 제31會 臨時總會에서 지청천(池靑天)·차이석(車利錫) 等 6人의 提案에 따라 亡國日인 11月 17日을 殉國先烈公同記念日로 制定하였습니다. 以後 8·15光復 前까지 臨時政府 主管으로 行事를 擧行하였고 1946年부터는 民間團體에서 1962年부터 1969年까지는 國家報勳處에서 1970年부터 1996年까지는 다시 民間團體 主管으로 顯忠日 追念式에 包含 擧行하였다. 그러다 獨立有功者 遺族들의 오랜 餘望과 宿願에 따라 1997年 05月 09日 各種 記念日 等에 관한 規定을 改正하면서 政府記念日로 復元되어 11月 17日부터 政府 主管 行事로 擧行해 오고 있습니다. 記念日 行事는 國家報勳處가 主管하며 生存 愛國志士 및 殉國先烈 愛國志士 遺族 3부요인과 憲法機關의 主要 인사 各界 代表 및 公務員·學生 等 2千餘 名이 參席한 가운데 擧行합니다. 서울特別市 西大門區 義州路 247(峴底洞 101番地)에 位置한 西大門刑務所는 大韓帝國 末에 日帝의 强壓으로 監獄이 지어져 80餘 年 동안 우리 近.現代史 激動期의 受難과 民族의 恨이 서려 있는 歷史의 現場이자 우리 民族의 抗日 獨立運動에 대한 日帝의 代表的인 彈壓機關이었습니다. 日帝는 우리나라를 强制 占領하고 이 땅을 발판 삼아 大陸으로 侵掠하려는 野慾을 本格的으로 全開하면서 그들의 侵掠에 抗拒하는 수많은 愛國志士들을 投獄하기 위한 監獄의 必要性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 大韓帝國時代에 自主獨立의 象徵으로 建立한 獨立門 近處에 1907年부터 大規模로 監獄을 지었습니다. 이 監獄은 日本人의 設計로 當時 貨幣 略 5萬圓을 들여 지었고 480坪 規模의 監房과 80坪 程度의 附屬 施設로 收容人員은 500餘 名 程度였다. 그때 全國 8個 監獄의 總 收容人員이 300餘名인 것과 比較하면 大規模의 監獄이었으며 1908年 10月 21日에 京城監獄이란 이름으로 門을 연 뒤 日帝에게 우리의 國權이 빼앗기자 이에 抗拒하는 民族 獨立運動이 全國에서 巨勢게 일어나고 日帝는 수많은 우리의 愛國志士들을 逮捕한 뒤 投獄하였습니다. 收容人員이 增加하자 그들은 麻浦 孔德洞에 또 다른 監獄을 지었고 이 때문에 1912年 09月 03日에 西大門監獄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1923年 05月 05日에 西大門刑務所로 그 이름이 다시 바뀌어 1945年 08月 15日에 光復을 맞기까지 수많은 愛國志士들이 投獄되어 拷問을 받으며 處刑되거나 獄死했던 惡名 높은 곳으로 1945年 11月 21日에 서울刑務所로 바뀌고 1961年 12月 23日에 서울矯導所로 1967年 07月 07日에 서울拘置所로 바뀐 뒤 1987年 11月 15日에 서울拘置所가 京畿道 醫王市로 옮겨가기까지 이름의 變化만큼이나 많은 民族 受難의 歷史를 간직한 채 1992年 08月 15日에 西大門獨立公園으로 開園하였습니다. 1987年에 京畿道 醫王市로 옮길 때 獄舍는 모두 15個 洞이었으나 現在는 歷史性과 保存가치를 考慮해 獄舍 7個洞과 死刑場 保安科 廳舍를 元型대로 保存하였습니다. 그中에서 獄舍 3個洞 (제10,11,12獄舍)과 死刑場은 1988年 02月 20日에 史蹟 제324號로 指定되었으며 西大門區에서는 1995年부터 西大門獨立公園 史蹟地에 대한 聖域化事業을 始作하였습니다. ▲. 祖國獨立을 위해 日帝의 侵掠에 맞서 싸우다 投獄되어 모진 拷問과 彈壓을 받고 殉國하신 愛國先烈들의 넋을 기리고 後孫들에게 우리 民族의 自主獨立 精神을 일깨워 주는 歷史의 산 敎育場으로 삼기 위해 새롭게 단장하여 1998年 11月 05日에 西大門刑務所歷史 館을 開館하였습니다. 舊 서울 拘置所(史蹟 제324호)의 日帝强占期의 名稱으로 서울特別市 西大門區 峴底洞 101番地에 있습니다. 前身은 刑曹의 指揮를 받아 罪囚를 管掌하던 典獄署이며 1908年(純宗 2) 10月 21日 日本人 建築家 시텐노 가즈마[四天王要馬]의 設計에 의해 仁王山麓의 錦溪洞에 韓國 最初의 近代式 監獄인 京城監獄으로 竣工되었습니다. 收容能力은 500名 程度였으나 그 後 여러 次例 增築되면서 1912年 日帝에 의해 西大門監獄으로 1923年 西大門刑務所로 불렸으며 1946年 京城刑務所 1950年 서울刑務所로 改稱되었습니다. 1961年 改正된 行刑法에 따라 서울 矯導所가 되었으며 1967年 07月 07日부터 1987年 獄舍를 京畿道 醫王市로 移轉할 때까지 서울拘置所로 불렸습니다. 1919年 3·1運動 當時에는 示威關聯者 1,600餘 名을 包含해 3,000餘 名이 收容된 것을 비롯하여 日帝强占期에 허위·柳寬順·姜宇奎 等 수많은 愛國志士가 收監되었던 民族受難의 現場으로 1945年 以後에도 間諜·思想犯 많은 運動權學生과 在野人士 等이 거쳐 간 곳으로서 韓國의 矯導行政上 빼놓을 수 없는 記念地인 이곳에는 柳寬順 굴·特殊拷問室 等이 있는 監房과 姜宇奎·宋學先이 處刑된 死刑場 및 一般事務室·敎會堂·工場·倉庫·炊事場·食堂·洗面場·監視塔과 運動場 等이 있었으며 1987年 03月부터 서울特別市는 民族의 受難과 獨立運動의 산 敎育場으로 活用하기 위해 이곳 全體를 史蹟으로 指定 西大門 獨立公園으로 造成했습니다. 西大門刑務所는 大韓帝國 末에 日帝의 强壓으로 監獄이 지어져 80餘 年 동안 우리 近·現代史 激動期의 受難과 民族의 恨이 서려있는 歷史의 現場이자 우리 民族의 抗日 獨立運動에 대한 日本 帝國主義의 代表的인 彈壓機關이었습니다. 1908年 10月 21日에 京城監獄이란 이름으로 門을 연 뒤 日帝에게 우리의 國權이 빼앗기자 이에 抗拒하는 民族獨立運動이 全國에서 거세게 일어나고 日帝는 수많은 우리의 愛國志士들을 逮捕 投獄시켰습니다. 收容人員이 增加하자 그들은 麻浦 孔德洞에 또 다른 監獄을 지었고 이 때문에 1912年 09月 03日에 西大門監獄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이름의 變化만큼이나 많은 民族受難의 歷史를 간직한 채 1992年 08月 15日에 現在의 西大門 獨立公園으로 開園하였습니다. 現在는 歷史性과 保存價値를 생각해 7個洞만을 元型대로 保存하고 그 中에서 獄舍 3個洞과 死刑場은 史蹟 第 324號로 指定되었고 西大門區에서는 1995年부터 西大門獨立公園 史蹟地에 대한 聖域化 事業을하였습니다. ●. 結 果. 祖國의 獨立을 위해 日帝의 侵掠에 맞서 싸우다 投獄되어 모진 拷問과 彈壓을 받고 殉國하신 愛國先烈들의 넋을 기리고 後孫들에게 우리 先烈들의 自主 獨立 精神을 일깨워 주는 歷史의 산 敎育場으로 삼기 위해 새롭게 단장하여 1998年 11月 05日 西大門刑務所歷史觀으로 開館하였습니다. 展示室 案內는 追慕의 場(1層) 映像室에서는 수많은 우리의 愛國志士들이 日帝의 侵掠과 彈壓에 抵抗하다 投獄되었던 西大門刑務所의 設立 背景과 그 歷史的 變遷 過程을 大形 映像으로 7分間 上映합니다. 企劃展示室은 祖國 光復을 위해 日帝의 侵掠에 抗拒하다가 殉國한 우리 民族의 活躍上을 發掘하여 多樣한 企劃을 開催하는 展示空間으로 使用하고 있습니다. 資料室은 韓國史 關聯圖書를 蒐集 所藏하여 歷史 專門 資料室로 構成하였고 特히 獨立運動史와 關聯한 資料·書籍들을 觀覽客들에게 提供하고 있습니다. 歷史의 場(2層) 民族 抵抗 室은 西大門刑務所가 設立된 歷史的 背景과 우리民族의 抗日 鬪爭史를 時代的 事件別로 展示하고 있습니다. 刑務所 歷史室은 西大門刑務所의 變遷 過程과 全國 刑務所 現況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하였고 1934年 西大門刑務所 配置 모형을 展示를 開催하는 展示空間으로 使用하고 있습니다. 獄中生活 室은 日帝의 拷問과 彈壓에 관한 獄中生活의 實像을 展示하고 있으며 觀覽客이 直接 體驗할 수 있도록 壁棺 獨房을 再現하였고 死刑場의 切開 模型을 立體的으로 展示하였습니다. 體驗의 場(地下層)은 臨時拘禁室과 拷問室은 愛國志士들을 訊問하고 拷問하는 곳으로 지금은 日帝가 저지른 殘酷한 各種 拷問 모습들을 文獻과 考證을 通해 再現합니다. 感謝 합니다! ●. 2012年 03月 25日. 獨立記念館 顯忠施設 解說士 龍湖 宋 哲 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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