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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훈교육 연구원 국가유공자반 강화도 답사 및 Monitoring!
작성일 2012-04-23작성자 송철효조회수 625

■. 보훈교육 연구원 국가유공자반 강화도 답사 및 Monitoring!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 개 요.  

▲. 일 자 : 2012년 04월 18일.  

▲. 장 소 : 강화도 광성보→강화역사박물관→강화평화전망대. 

▲. 주 최 : 국가보훈처. 

▲. 주 관 : 보훈교육연구원.  

▲. 목 적 : 국가유공자 애국심 함양.  

▲. 사 진 : 첨부 하였습니다.  

▲. 개             설.  

2012년 04월 18일 오늘은 보훈교육원에서 강화도를 답사하였습니다. 강화도(군)은 인천광역시 북서부 경기만에 있는 군으로 1995년 경기도에 속했던 강화군 전체가 인천광역시에 통합되었습니다. 수도에 인접한 관문으로서 고려시대의 몽고침입과 조선시대의 병자호란·병인양요·신미양요·운양호사건 등 역사사건의 무대가 되었던 곳입니다. 최근에는 수도권지역의 주말관광·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강화도(군)은 등 1개 읍 12개면 184개 동리가 있습니다. 군청소재지는 강화읍 면적 411.21㎢ 인구 65,510 인구밀도 160명/㎢(2006). 우리나라에서는 5번째 인천광역시에서는 제일 큰 섬으로 강화군의 중심 섬이며 주변에 약 15개의 섬들이 있습니다. 원래는 3개의 섬이었으나 간석지가 넓게 퍼지면서 연결된 것이며 최고봉인 마니산 469m을 비롯하여 400m 내외의 산이 많으나 험준하지 않고 저평한 충적지가 발달했으며 남쪽 강화만으로는 넓은 간석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강화읍을 중심으로 도로가 사방으로 나 있으며 1970년에 강화대교(694m)가 건설되면서 육지와 연결되어 교통이 더욱 편리해졌으며 특히 곳곳에 역사적인 유물·유적이 많아 안보·사적 관광지로 이번 답사는 아주 유익하고 보람된 현장교육이었습니다.  

●. 내                용.  

▲. 1225년 몽고의 사신으로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던 저고여(著古與)가 국경지대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몽고는 이것을 트집 잡아 본격적인 고려정벌을 시작 1231년에 있었던 제1차 침입에 이어 1257年까지 고려는 무려 7차례에 걸쳐 몽고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제1차 침입 때 살리타(撒禮塔)가 이끄는 몽고군이 압록강을 건너 개경까지 침입해오자 고려는 화의를 요청했고 몽고은 서북 면에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설치하고 철수했으나 몽고가 계속 무리한 조공을 요구해옴에 따라 고려는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단호히 항전할 것을 결의했으며 고려의 무신정권은 강력한 항몽정책의 하나로 농민들로 하여금 산성과 섬으로 들어가 살게 하였습니다. 고려의 입조(入朝)·출륙(出陸)을 요구하는 몽고와 우선 철수를 요구하며 대립하던 고려는 형세가 불리해지자 1259년(高宗 46) 태자 전(倎) 등 40여 명을 몽고에 보내는 한편 강화도의 성을 헐고 굴복했으며 같은 해 06월 고종이 죽자 태자가 귀국하여 원종(元宗)이 되어 태자 심(諶:忠烈王)을 몽고에 보내고 자신은 강화도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1269년 고려는 친 몽 정책을 쓴 원종을 폐위했으나 몽고의 압력으로 복위시켰으며 원나라의 초청으로 연경에 갔다가 귀국한 원종이 개경에 환도함으로써 고려는 사실상 원의 지배하에 들어갔습니다. 강화천도 시 몽고군과의 끈질긴 항쟁을 뒷받침했던 것은 고려 백성의 드높은 애국심과 민족의식이었습니다. 삼별초의 난을 일으킨 무사들의 항거정신이 이를 증명하며 부처의 힘을 빌려 나라를 수호하고자 15년에 걸쳐 완성한 팔만대장경 또한 이 시대에 이루어낸 큰 업적입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자주성을 잃어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까지는 원의 부마국이 되는 수모를 겪었으나 일찍이 동서 문화의 교류에 힘쓴 원으로부터 천문·의학·예술·화학·목화 등이 전래되어 고려 문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 강화도는 인천광역시의 북서부에 있는 섬으로 행정구역상으로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속해 있으며 강화대교와 강화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 유적지와 단군왕검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는 삼랑성과 참성단과 가장 오래된 한옥성당인 성공회 강화성당이 있고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 화도면 동막리 유적과 하점면 삼거리 유적 등에서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가 다량 출토 된 것으로 보아 강화도에는 신석기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강화도에서는 특히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을 쉽게 볼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고인돌입니다.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이 혼재하는 것이 큰 특징이며 고인돌의 대부분은 고려산 부근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몽고 제국과 전쟁 했을 때는 도읍이 강화도로 옮겨졌고 이곳의 목판 인쇄소에서 팔만대장경 조판이 이뤄지기도 했으며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후에는 강도라 불렸는데 강도의 왕궁 터와 고려시대의 성곽이 아직까지 남아 있고 강화도 천도 이후 식량의 자급력 향상을 위한 간척사업이 추진되었으며 국난극복을 위해 강화도 남쪽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았으며 개경 환도 이후에는 배중손을 중심으로 삼별초가 항몽 정권을 강화도에서 수립했으나 곧 진도로 남하했습니다.  

▲. 이후 조선시대에는 강화도가 수행하는 국방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태종 때 강화는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조운의 활성화와 함께 한강의 입구로서 진이 설치되고 김포 양화 통진 교동 등지의 진을 통괄하게 되었으며 강화부사는 경기 병마절도사가 겸임 임진왜란 당시에는 강화도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고 우성전 김천일 등이 의병장으로 활동하며 권율 장군을 지원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강화도는 유배지로도 유명했는데 연산군 광해군 등이 이곳으로 유배를 왔었고 정묘호란 때에는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였으며 이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남한산성에 봉림대군 등의 왕족들은 강화도로 피신했는데 청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인조도 항복하였다. 이후 남양에 있던 경기수영이 강화도로 옮겨졌습니다. 효종 때에는 북벌 정책을 계획하면서 해안에 월곶 진 제물 진 광성보 등의 진과 보를 설치하였고 성곽을 수리했으며 숙종은 해안 전역의 돌출부에 53개의 돈대를 설치하여 강화도의 전 지역을 요새로 하였고 지금도 이렇게 만든 조선시대의 군사시설이 많이 남아 있으며 양명학으로 유명한 정제두가 강화도에서 일생을 보내면서 주자학에 치우치지 않고 경전의 본뜻을 중시하는 강화학파라 불리는 학풍이 일어났고 정조 때에는 외규장각이 강화도에 설치되어 강화성을 공격하는 France군 조선후기 병인박해를 구실로 1866년 France 함대가 강화도로 쳐들어 온 병인양요가 일어나 이로 인해 강화의 외규장각이 약탈되는 등의 피해를 입었으며 1871년에는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한 신미양요가 일어났고 큰 피해를 입었지만 미국 함대를 몰아냈습니다.  

●. 결            론.  

1875년에는 일본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하여 운양호사건을 일으켰으며 그 다음해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문화재가 약탈당했고 분묘는 도굴되었습니다. 광복 후에도 관리 소홀로 군사 유적이 대부분 파괴되었고 섬 내 의 성들도 파괴된 정도가 심해서 성의 크기조차 알 수 없는 경우도 있고 한국 전쟁 당시에는 강화도에서 대규모 학살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며 개성에서 피난민이 강화도로 오면서 인삼재배가 시작되었으며 1970년에는 강화대교가 건설되면서 육지와 연결되었고 1976년에 강화중요국방유적복원 정화사업으로 유적들이 복원 관리되고 있습니다. 2000년 11월 29일에는 제 24차 UNESCO 세계유산위원회에서의 강화 고인돌이 고창 화순의 고인돌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강화도는 지체 구조상 경기 육괴에 속하는 지역으로 섬 내에 가장 높은 산인 마니산이 469m로 전체적으로 저 산성 구릉지에 속하지만 서해안의 다른 섬들에 비해서는 비교적 산이 높은 편입니다. 대부분의 산들은 쥐라기의 대보조산운동 때 생긴 화강암 저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강화도는 고려시대에 전란으로 인하여 임시 왕도로 되기도 하였고 특히 조선시대말기에는 외세에 대항하기 위한 국토방위 시설이 여러 곳에 설치되어 병인양요·신미양요 병자수호조약 등을 겪은 근대 개항 100년의 피와 눈물의 역사가 생생하게 담겨 있는 곳입니다. 유적들은 1977년에 완전 복원되어 호국정신의 교육 도장으로 함과 동시에 부근의 전등사 등과 함께 새로운 관광 명소로 개발되고 있는 강화도의 역사 안보 현장견학은 참으로 유익한 답사교육이였습니다. 감사 합니다!  

●.2012년 04월 22일. 국가보훈처 알림이 및 자문위원 龍湖 宋 哲 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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