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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광복제67주년, 버림받고 잃어버린 애국이 되어서는 안돼
작성일 2012-05-17작성자 정병기조회수 607

<기고>광복제67주년, 버림받고 잃어버린 애국이 되어서는 안돼

미발굴독립유공자 후손 선조 독립운동 자료찾아 36년 고군분투
광복 67주년인데 … 독립운동가 후손 정용선선생의 증손자 36년째 고투

일제시대 경성형무소(현 서대문형무소,경성형무소 원자리 공덕동 서부법원자리)에서 옥사한 증조부가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국가를 상대로 36년째 외롭고 지루하고 고독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미발굴독립유공자의 후손인 증손자가 있다.

나는 ‘광복 67주년’인 올해도 어김없이 아픈 몸을 이끌고 만사를 제쳐놓고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다. 증조부가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단서만 있다면 만사를 제쳐두고 어느 곳이든 달려간다. 부양할 가족도 있고 몸도 성치 않지만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증조부와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았을 조상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만 둘 수 없다.

나는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비록 인정은 받지 못했지만 "증조부님이 자랑스러운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마음 뿌듯하게 생각한다." “아버지와 친척 등의 증언을 종합하면 증조부인 정용선(1883년생) 선생은 1900년대 초부터 1916년까지 고향인 경북 봉화군을 중심으로 독립군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가 확실하다”고 주장해 왔고 그것 이사실이다. 옥사시록이 제정호적에 확연하게 나와 있다.

돌아가신 고모나 큰댁이 증조부님 때문에 온샂수난과 고초를 겪어왔다는 사실을 잘알고 있기 때문이다. 독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친일파의 집을 털고 일본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위험천만한 활동을 서슴지 않았다는 그의 증조부는 1916년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고 10년 가까이 지난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형무소장이 보낸 옥사했다는 사실통지서 한통만 날아왔다.

일제강점기 “당시 반일 활동가를 가두던 경성형무소에서 장기복역하다 숨졌다는 것 자체가 증조부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희생됐다는 증거”라고 본다. 그 사실은 바로 일제가 형무소에서 온갖 탄압과 고문 그리고 굶주림과 강제노역으로 옥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또 증조부로 인해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자 이를 견디지 못한 일가친척들이 증조부 이름을 족보에서 파버렸고 증조부가 실종된 후 일제의 화가 미칠까 두려워한 가족들이 나서서 증조모를 개가시켰다는 사실은 독립운동을 했음을 뒷받침하는 명백한 ‘정황증거’라고 강조했다. 실제 호적등본을 보면 증조모는 독립투사의 아내였던 것을 감추기 위해 본명인 ‘박열이’에서 ‘정열이’로 개명까지 했다. 개가한 인동장씨 호적을 보면 그 내용을 잘알 수 있는데도 정부는 두손 놓고 있어 안타깝다.

그러나 일제가 만든 호적에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서 병으로 사망했다는 기록 외엔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것을 증명할만한 서류는 남아있지 않다. 당시 수형당한 경성형무소가 불에 탔기 때문이다. 이는 후손들의 귀책사유가 아니라 정부문서를 관리하는 정부의 책임이라고 본다.

국가보훈처는 물론 국가권익위원회 청와대에까지 서류를 안 내밀어 본 곳이 없지만 ‘객관적인 입증자료인 거증자료가 없어 독립유공자로 선정할 수 없다’는 답변뿐이었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그래서 증손자인 본인이 국내에서 안되면 외국에서라도 찾아보자는 생각에 1993년 미국 의회도서관에 편지를 띄워 수형인 명부가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 마이크로필름 500장을 200달러를 주고 사오기도 했다. 일본 외무성에 수차례 서신을 띄우기도 했지만 안타깝게 결정적인 사료를 찾는 데는 실패했다. 지난해엔 국가를 상대로 행정소송까지 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지난 정권인 전두환정권이 관보로 지시(형의실효에 관한 법률)“일제시대 형무소 수형인 기록을 지난 80년 12월 실수로 모두 불살라버렸던 정부가 이제 와서 독립운동으로 수감됐다는 걸 증명할 문서를 가져와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준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더욱이 일본 외무성은 1995년까지 조선인 수형인 명부를 보관했지만 우리 정부는 단 한번도 그 서류를 요청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관련 자료는 반영구적으로 보존되어야 할 서류임에도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지난정부의 실책이라고 본다. 그래도 개인이 후손들이 책임지고 찾아와야 한단 말인가?

조부이신 정덕수 할아버지는 인접 금광(풍정광업소)에서 일하다 폐병으로 숨졌다. 증손자인 자신은 경찰관으로 근무하던 지난 1980년 강도살인범을 붙잡다 부상을 당했다. 당시 후유증에 간경화로 지금도 고통을 받고 있다. 독립운동가의 겪은 고통과 수모를 어찌 말이나 글로 다할 수 있겠는가?

본인은“독립운동가를 찾는 일을 후손들에게만 떠넘기는 정부가 야속하지만 어디엔가 분명히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있을 거라 믿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정부는 뒤 늦은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그후손들 가슴에 못박는 일이 없게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며, 일제강점기 관련 호적도 중요하게 다루고 살펴 독립유공이 인정되는 분들에 대해서는 명예를 찾아주고 그후손들에 대한 배려와 지원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본다.

정부는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해 일제와 맞서 싸우다 체포되어 모진고문과 강제노역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한많은 생을 마친 악명높던 마포 경성형무소 식민지역사관을 세우고 후손들에게 일제의 만행과 탄압사실을 알려야 할 것이다. 지난 과거의 잘못된 사실을 알려야 살아있는 역사교육이고 민족교육이 아닌가 생각한다. 글쓴이/정병기 <미발굴독립유공자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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