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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선<미발굴독립유공자, 증손자 증조부 항일독립운동 밝히려 36년 고군분투>
작성일 2013-04-18작성자 정병기조회수 1,249

정용선<미발굴독립유공자, 증손자 증조부 항일독립운동 밝히려 36년 고군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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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선(鄭溶璿, 1883년 ~ 1928년)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편집] 생애

일제시대 경성형무소(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 독립투사. 정용선의 행적에 대해 구여순이 1919년 2월 28일 동생 은득(銀得)의 요청으로 3월 3일 상경하여 3·1운동에 참가하고 곧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3월 12일 고향으로 돌아와, 동지 최정학(崔正學)·이우식(李祐植)·김봉연(金琫淵)·정용선(鄭溶璿) 등과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고 14일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사실이 문서에 남아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명 서류가 없어 국가적인 유공자로 공인은 못 받은 상태이다. 그의 증손인 정병기(2010년 현재 53세)는“아버지와 친척 등의 증언을 종합하면 증조부인 정용선(1883년생) 선생은 1900년대 초부터 1916년까지 고향인 경북 봉화군을 중심으로 독립군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가 확실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씨에 따르면 독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친일파의 집을 털고 일본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위험천만한 활동을 서슴지 않았다는 그의 증조부는 1916년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고 10년 가까이 지난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통지서 한통만 날아왔다고 한다. 결정적인 증거로 그는“당시 반일 활동가를 가두던 경성형무소에서 장기복역하다 숨졌다는 것 자체가 증조부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희생됐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증조부로 인해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자 이를 견디지 못한 일가친척들이 증조부 이름을 족보에서 파버렸고 증조부가 실종된 후 일제의 화가 미칠까 두려워한 가족들이 나서서 증조모를 개가시켰다는 사실은 독립운동을 했음을 뒷받침하는 명백한 ‘정황증거’라고 강조하고 있다. 실제 호적등본을 보면 증조모는 독립투사의 아내였던 것을 감추기 위해 본명인 ‘박열이’에서 ‘정열이’로 개명까지 했다. 그러나 일제가 만든 호적에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서 병으로 사망했다는 기록 외엔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것을 증명할만한 서류는 남아있지 않다. 정병기는 증조부가 독립유공자임을 인증하기 위해 1993년 미국 의회도서관에 편지를 띄워 수형인 명부가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 마이크로필름 500장을 200달러를 주고 사오기도 했다. 일본 외무성에 수차례 서신을 띄우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사료를 찾는 데는 실패했다. 2009년엔 국가를 상대로 행정소송까지 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국가의 독립유공자 자격 인증에 대해 정병기는 “일제시대 형무소 수형인 기록을 지난 80년 12월 실수로 모두 불살라버렸던 정부가 이제 와서 독립운동으로 수감됐다는 걸 증명할 문서를 가져와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준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더욱이 일본 외무성은 1995년까지 조선인 수형인 명부를 보관했지만 우리 정부는 단 한번도 그 서류를 요청한 적이 없다”고 하고 있다. 객관적인 인증을 위해 더더욱 증빙자료가 필요한 현실이다.

[편집] 참고자료

내일신문, 내일의 희망을 전하는 정치경제일간지 내일신문, 광복 65주년인데 … 독립운동가 후손 정병기씨 35년째 고투, 고병수기자 byng8@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10-08-13 오후 12:40:52 게재, 2010년[깨진 링크]

[편집] 주석

 

분류: 1883년 태어남

1928년 죽음

한국의 독립운동가

사형된 사람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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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기님의 댓글

정병기 아이피 (125.♡.24.190) 작성일

마포 경성형무소 식민지역사관 건립해야
 

목숨과 맞바꾼 독립운동
 민족혼ㆍ애국심 잊지말고
 숭고한 나라사랑 독립정신 되새김해야
 
일제강점기 악명높던 마포구 공덕리 105번지 경성형무소이다.
 
독립을 위해 그들은 목숨을 잃어가면서 만세를 부르고 모진 고문과 탄압에도 굴하지 않았다. 역사의 현장 악명 높던 경성형무소 자취조차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지고 있지만 그분들은 민족위해 투쟁하며 차가운 감방에서 주거나 형장에 이슬로 사라지면서도 노래를 부르며 웃음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경성형무소는 진정한 독립성지, 민족의 성지라고 본다.
 
일제가 강제병합으로 식민지를 시작하여 민족운동인 1919년3월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 난지 92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구국의 일념으로 맨손으로 나라의 독립을 찾겠다고 세계만방에 알린 3.1 만세운동은 우리민족의 정신과 의지의 표본이며 맨손으로 나라의 독립을 찾겠다는 군은 신념과 정신 그자체로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라를 잃고 방황하고 유랑하면서도 후손들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겠다는 일념으로 일제와 싸우고 투쟁하며 목숨을 바치고 붙잡혀 현장의 이슬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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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기님의 댓글

정병기 아이피 (125.♡.24.190) 작성일

경성형무소 &lt;마포형무소&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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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형무소(麻浦刑務所)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 제국이 서울에 세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까지 사용되었던 형무소이다.

개요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전인 1908년에 서대문형무소의 전신인 경성감옥이 서울 서대문구에 지어졌다. 경성감옥의 수용 공간이 부족해지자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새 감옥이 신설되어 경성감옥으로 불리게 되었고, 서대문의 경성감옥은 서대문감옥으로 개칭했다.
 
마포의 경성감옥은 1923년부터 경성형무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대전형무소와 함께 무기수나 장기 수형자를 수용하였다.[1] 김일성의 숙부인 김형권이 옥사한 곳으로도 알려졌다.
 
일제 패망 후 1946년에 마포형무소로, 1961년에는 마포교도소로 각각 개칭했다. 1963년 경기도 안양시에 신설된 안양교도소로 이전하면서 폐지되었다.
 
마포형무소 건물은 이전 후 사라졌고, 그 터에는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이 들어서 있다. 1995년에 마포구 공덕동 105번지 마포형무소 자리에 &quot;1912년 日帝가 경성형무소를 설치하여 항일(抗日) 독립 운동가(獨立運動家)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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