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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1■.북한군이 불법 남침한 Korean War(6.25전쟁)!
작성일 2013-05-31작성자 송철효조회수 369

13.91■.북한군이 불법 남침한 Korean War(6.25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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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槪 要.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07월 27일까지 약 3년 1개월간 지속된 전쟁으로 당시

시흥군에 속해 있던 광명 지역도 전쟁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시흥은 서울~수원

~오산으로 이어지는 인민군의 주공격 방향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시흥군이 수도 서울에

인접했기에 서울 방어와 탈환을 위한 공방전이 전개된 지역임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재 남아 있는 기록들로는 광명 지역의 구체적

피해 상황을 확인하기 어렵고 시흥군 전체의 피해 상을 통해 대략적인 상황을 추정하고

다. 1948년 남한에서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1948년 08월 25일 북한에서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시행하고 09월 0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이리하여

해방 이후 3년간의 정치 공백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강요된 외압에 따라 분단

국가가 성립되고 말았고 끝내는 6·25전쟁이라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6·25전쟁 당시 광명 지역은 지역별로 피해 상황의 크게 달랐다. 지역민의 말에 따르면 하안동 밤일마을의 경우 인천상륙작전 시 퇴각하던 인민군 20여 명을 본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반면 원광명과 식골 등 광명동 지역에는 1·4후퇴 때 인민군과 중공군이 들어와 머물렀다고 한다.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원광명은 인민군 5군단의 본거지가 되어 주민들의 집에 인민군 장교들이 머물렀으며 동네 아이들에게 인민군 노래를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중공군이 마을의 돼지를 잡아먹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광명 지역은 인근 안양이나 오산처럼 전투의 한복판에 있지는 않았으나 서면사무소와 서면초등학교가 반파되는 등 손실을 입었다. 1956년 간행된 경기도지에 따르면 1951년 09월 01일 기준 서면을 포함한 시흥군의 사망자는 1,888명이고 91명이 납치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후 정밀 조사 결과 남자 646명 여자 1명이 납치된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중 주소·직업·연령이 확인된 사람은 620명이다. 현재 광명 지역인 서면에서 납치된 것으로 확인된 사람은 60명으로 집계되었다. 3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인명 피해뿐만 아니라 전쟁 재해민과 피난민도 많이 발생하였다. 특히 시흥 군을 포함한 경기도 남부 지역은 피난민들의 집결지가 되었는데 시흥 지역 난민 구호자의 규모는 1951~1955년 4만에서 6만 명 정도로 나타난다. 지금의 광명7동 지역에도 피난민들이 들어왔고 작은 규모의 장터가 세워졌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 內 容.

 

▲. 6·25전쟁은 인적·물적 피해뿐만 아니라 주민간의 갈등과 민족 분단 의식의 고착화를 야

기하였다. 이는 광명 지역뿐만 아니라 한국의 모든 국민들에게 현재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문제로 남북 화해를 통한 평화적 민족 통일을 이루기 위해 극복해야할 시대적 과제입니다.

전쟁의 발발과 유엔군의 참전 남한의 의견에 따르면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한 한국군은

한 대의 전차도 없이 240여 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해 오는 인민군에게 밀려 후퇴하였

다. 이전부터 38선 부근에서의 소규모 충돌이 많았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많이 놀라

지 않았으나 잠시 뒤 군용차가 거리를 질주하고 3군 장병들은 빨리 원대로 복귀하라는 마

이크 소리가 요란해지면서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지만 무슨 일인지 알 길은 없었다. 오전

7시가 넘어서야 방송은 북한군이 침범해왔다는 소식만 간단히 전하고 장병들은 누구를 막

론하고 빨리 원대복귀 하라는 공지방송만 반복하고 있었다. 0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비

상 국무회의에서 정부의 수원 천도가 정식으로 의결되었다. 06월 27일 저녁에 서울 근교까

지 밀어닥친 인민군들과 육박전을 감행했으나 워낙 전세가 불리하여 정부를 대전으로 옮겼

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06월 30일이 되도록 한강을 건너지 않았습니다.

 

▲. 서울에서 3일간 머물렀다는 사실은 북한의 전쟁계획이 남한 전역을 점령하려는 것이 아

니었다는 가설을 제기하게 한다. 즉 북한은 서울만 점령함으로써 전쟁을 끝내려 했다는 것

이다. 이를 제한전쟁설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편 대한민국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자 주미 대

사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성에 사태의 긴급성을 알렸고 미국은 유엔안보리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했다. 이에 따라 UN 안전보장이사회는 06월 26일 오전 4시에 소집되어

북한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미국의 제안을 9

대 0으로 가결하였다.(유고슬라비아는 기권) 이러한 결의를 북조선 측에 통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06월 27일 다시 안전 보장 이사회를 열었다. 결국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

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의 회원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기에 이르 렀

다. 그 동안 대전까지 들어온 인민군이 진로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호남 경북 왜관(낙동강)

영천 포항 등지로 육박하자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와 있던 한국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

였다. 한편 한국군을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편입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 전선

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하였다.  인천 상륙 작전 이 문서의 본문은 인천 상륙 작전

입니다. 맥아더 사령관이 지휘하는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인천 상륙 작전(09월 15일)에

성공함으로써 서울을 빼앗긴 지 3개월 만인 09월 28일에 서울을 되찾았다. 이어 달아나는

인민군을 뒤쫓아 38선을 돌파하여 10월에는 평양을 거쳐 압록강에 이르렀고 11월에는

두만강 일대까지 진격하였다.  중국의 참전과 1.4 후퇴 대한민국 군에 의한 무력 통일을

눈앞에 두었을 때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해방군이 전쟁에 개입하여 인해 전술로 반격해

왔다. 다시 국군은 50여 만 명의 인민해방군에 밀려 후퇴하기 시작했다. 12월 14일부터 24

일 사이에 동부 전선의 국군 12만과 피난민 10만이 흥남 부두에서 해상으로 철수했고 01월

04일에는 서울을 다시 내줄 수밖에 없었다. 01월 0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어 인민 무력은

계속 남진했으나 국군은 이미 병력과 장비를 정비하여 반격 태세를 갖추었다. 인민군은 10

여 만의 전사자를 내면서 퇴각하였고 03월 02일에 아군이 한강을 넘어서 14일에는 서울을

되찾았다. 다시 북진했으나 9·28 수복 후처럼 쉽지 않았다. 인민군이 이미 전 전선에 참호

를 구축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쟁은 오랫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 휴전 협정은 1951년 07월에 정전 회담이 개시된 후 세계 전쟁 사상 처음 보는 제한 전

쟁(휴전이 되면 각기 점령 지역에서 국경이 정해지는 조건으로 싸우는 전쟁)이 벌어졌다.

군사분계선 문제는 이미 1952년1월 27일에 타결되었으며 1952년 05월에 이르러선 포로 교

환 문제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의제에 합의하였다. 1953년 03월 05일스탈린의 죽음으로

정전 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어 1953년 03월 19일 소련 내각은 韓國戰爭을 정치적

으로 마감한다는 결정을 중국과 북한에 통보하면서 부상포로의 우선 교환에 동의하도록 지

시(또는 요청)했다. 북조선소련을 통해 휴전을 제의하였고 유엔군 측의 승인으로 휴전이

되었다. 1953년 07월 27일에 휴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한국 전쟁 휴전으

로 매듭을 지어졌고 현재까지 그 효력이 이어지고  피해 3년 1개월에 걸친 同族相殘의

6·25 전쟁은 남·북한의 전 국토를 폐허화했고 참전한 외국의 병력에까지 극심한 해를 입혔

다. 6·25 전쟁은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戰爭未亡人과 1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를 만들었

으며 1천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습니다.

 

●. 結 果.

 

大韓民國은 미국의 통계에 의하면 60만 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였고 전체 참전국의 사망

자를 모두 합하면 2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인 사망자는 백만 명이 넘으며 그중

85%는 민간인이다. 소련의 통계에 의하면 북한의 11.1%의 인구가 전쟁을 통하여 사망하였

는데 이것은 113만 명에 이른다. 남북한 모두 합하여 250만 명이 사망하였다. 80%의 산업

시설과 공공시설과 교통시설이 파괴되었고 정부 건물의 4분의 3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으

며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미군은 약 54,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이는 베트남 전쟁 때보다는 약간 적은 수이지만 훨씬 짧은 시기를 고려한다면 많은 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이승만이 예상했던 대로 위기의 이승만 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전쟁을 통해 아직 꼴을 갖추지 못했던 국가는 이제 미군의 주둔과 미국의 경제

지원으로 군사적·경제적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고 전쟁 이전에 이미 마련되었던 反共主義

를 더욱 확고한 국가 이념으로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 매 체.

 

1. 國家報勳處 현충시설통합정보 알림이 2. 國家報勳處 열린마당 국민광장 참여사

진 3. 國務總理室 자유게시판 4. 武功受勳者會 소통마당 자유게시판 5. 傷痍軍警회

컴뮤니티 자유게시판 6. 카페 全北道廳 신명이 모니터 7. 카페 全北道廳 행정 정보

공개 단 8. 카페 Pride 여산, 여산인 9. 카페 옛 그늘 文化遺産 10. 國防部 국민 공

감 나도 한마디.

 

●. 2013.05.31. 國家報勳處 알림이 및 諮問委員 龍湖 宋 哲 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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