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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사 김규식 선생 순국 60주기 추모식
작성일 2011-03-14작성자 관리자조회수 2,201

◈ 10일(금) 14시, 종로구민회관에서 열려 ◈

조국광복과 민족의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치신『우사(尤史) 김규식 선생의 순국 60주기 추모식』이 10일(금) 오후 2시에 종로구민회관에서 우사김규식선생기념사업회(회장대행 김영기) 주관으로 열린다.

이날 추모식에는 최완근 서울지방보훈청장, 남만우 광복회 부회장, 광복회원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공적 및 약력소개, 김영기 회장대행의 대회사, 국가보훈처장(대독)·광복회장(대독)·삼균학회이사장의 추모사에 이어 헌화·분향 및 추모시 낭독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추모식에 이어 “우사 김규식 박사와 민족자주연맹(한신대 서굉일 교수)”,  “민족자주연맹과 남북통일연석회의(임형진 정치학 박사)”를 주제로 학술회의가 개최된다.

우사 김규식 선생(1881.1.29~1950.11.15)은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미국에 유학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가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8년 8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가입하였고, 1919년 2월 한국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총장에 피선되었으며, ‘한민족의 일본으로부터의 해방과 한국의 독립국가로의 복귀에 관한 청원서’와 ‘한민족의 주장’을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하여 일제침략의 악랄함과 한국 독립의 필연성을 호소하였다.

1919년 8월말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장에 임명되어 군자금을 임정에 송부하는 한편 3·1독립운동을 계기로 고조된 분위기를 활용하여 한국독립문제가 미국하원에서 상정 토의되도록 하였다.

1919년 9월에는 임시정부 학무총장에 임명되었고, 1921년 1월 상해로 돌아와 임정에 합류하였다. 1927년에는 천진(天津)으로 옮겨가 1929년까지 북양대학(北洋大學)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중 유자명(柳子明) 등과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를 조직하였다. 또한 1933년 중한민중대동맹(中韓民衆大同盟)을 결성하고 그 대표자격으로 북미 각지에 가서 독립운동자금 약 8천불을 모집해 왔다.

통일전선을 성립시켜 한민족의 대동단결을 강조해온 그는 1935년 6월 20일부터 7월 3일까지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신한독립당, 조선의열단, 대한독립당(하와이), 미주대한국민회, 뉴욕 대한인교민단, 하와이 대한국민회, 하와이혁명동지회의 9개 단체 대표 32명으로 하여금 남경에 모여 혁명단체대회를 열게 하였다. 여기서 단일당의 숙원이 달성된 셈인데 이것이 조선민족혁명당이었다. 그러나 조선민족혁명당은 통일정당으로 명맥을 유지하지 못하였다. 1936년에 조소앙이 이탈했고 최동오·홍 진·이청천이 차례로 탈퇴하였다.

우사(尤史)는 1942년 10월 장건상과 같이 임정국무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보선되었으며 1944년 2월에는 주석·부주석 지도체제로의 5차 개헌에 따라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그는 1945년 11월 23일 백범 등과 귀국할 때까지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후 그는 좌우합작 남북협상을 주도하다가, 6·25당시 북한에 납치되어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문의) 국가보훈처 기념사업과 02)2020-5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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