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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 황현 선생 순국 100주년 추모식
작성일 2011-03-14작성자 관리자조회수 1,540

◈ 10일(금) 오전 10시 30분, 매천 황현 선생 유적공원에서 열려◈

한말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역사가이며, 국치를 통분하여 순절하신 『매천 황현선생 순국 100주년 추모식』이 10일(금) 오전 10시 30분, 광양시 매천 황현선생 유적공원에서 매천 황현 선생 추모위원회(위원장 이성웅, 박태상)주관으로 열린다.

이날 추모식은 장갑수 광주지방보훈청장, 이성웅 광양시장, 우윤근 국회의원, 유족, 독립운동관련단체장 및 각 기관단체장 시민, 학생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의례, 경과보고, 행장문 낭독, 광양시장의 개식사, 국가보훈처장 추모사(광주지방보훈청장 대독), 우윤근 국회의원의 추모사, 박노근 시의회의장의 추모사, 시인 문병란의 헌시 낭독, 유족대표 황승연의 예사에 이어 시비 제막식, 기념식수, 헌화 및 분향 순으로 진행된다.

매천 황현 선생(1855.12.11~1910.9.10)은 전라남도 광양(光陽)군 서석촌(西石村)에서 태어나 구례(求禮)로 이사하여 성장하였다.

1883년에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하여 초시초장에 황현의 글이 첫째로 뽑혔으나 시험관이 황 현이 시골 출신임을 알고 둘째로 내려놓으니 선생은 조정의 부패를 절감하고 회시(會試) 전시(殿試)에 응시하지 않은 채 귀향하였다.

1888년에 부친의 명을 어기지 못하여 다시 상경해서 생원회시(生員會試)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였다. 당시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후 청국의 적극적인 간섭정책 하에서 수구파 정권의 가렴주구와 부정부패가 극심하여 선생은 부패한 관료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다시 귀향하였다.

그는 구례에서 조그만 서재를 마련하여 3천여 권의 서책을 쌓아 놓고 두문불출한 채 독서에만 전념하였다.

황현은 이 때 시문뿐만 아니라 역사연구에도 몰두했으며, 경세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학문을 닦았다. 그러나 이 무렵에 나라의 정세는 풍운이 급박하여 1894년에는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경장이 연이어 일어났다. 황현은 급박한 위기감을 느끼고 후손들에게 기록과 귀감을 남겨 주기 위하여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오하기문(梧下紀聞)』을 써서 자기의 경험한 바와 견문한 바를 1910년 순절 할 때까지 비평록으로 저술하였다.

1905년 11월 일본제국주의가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그곳에 가 있는 친우 김택영을 만나서 그와 함께 국권회복운동에 종사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였다.

 그는 중국에의 망명이 실패하자 집에다 중국역대의 난세에 깨끗이 처신한 처사(處士) 열 사람의 행적을 시와 그림으로 그려서 열 폭 병풍을 만들어 둘러치고 다시 이전과 같이 두문불출한 채 비평록을 쓰면서 칩거하였다.

이 때 쓴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의 내용에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상을 그때마다 낱낱이 기록하고 일제에 추종하여 나라를 판 매국노들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하여 준렬하게 비판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그는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네 수(首)의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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