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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선생 순국 77주기 추모식
작성일 2011-03-14작성자 관리자조회수 701

◈ 17일(화) 오후 4시, 우당기념관에서 추모식 및 우당 장학금 수여 ◈

◈ “독립을 위해서는 먼저 백성을 깨우쳐야 한다”는 ‘교육입국론’ 주창,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설립하여 독립운동 인재 양성의 초석을 다져 ◈

 

만주지방에 한인 자치기구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이바지하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우당 이회영선생 순국 77주기 추모식」이 17일(화) 오후 4시에 우당기념관(종로구 신교동)에서 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회장 홍일식) 주관으로 열린다.

이날 추모식은 손용호 북부보훈지청장, 남만우 광복회 부회장·이강래 민주당 원내대표, 이종걸 국회의원, 한화갑 前 민주당 대표, 윤형섭 前 교육부장관과 광복회원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사업회장의 기념사와 북부보훈지청장·광복회장·민주당 원내대표의 추모사에 이어 윤장순 장학회이사장의 장학금 수여 및 임웅균 교수의 추모가, 유족대표 인사 순으로 진행된다.

우당장학회(이사장 윤장순)에서는 매년 선생의 순국 주기에 맞추어 장학금을 지원해 왔으며, 올해 순국 77주기를 맞아 오호영 애국지사(‘04년 대통령표창)의 손자 오지훈(고려대 환경생태공학부 4년) 학생 등 독립유공자 후손 50명에게 총 5,000만원의 장학금을 전달할 계획이다.

 

이회영 선생(1867.3.17~1932.11.17)은 한말 이조판서를 지내던 이유승의 4남으로 일제에 국권이 침탈당하자 명문대가의 자손이지만 일신의 안락과 영화를 혼연히 버리시고 구국운동에 몸을 바치신 독립운동가로서 1910년 재산을 처분하고 6형제 40명의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10년 봄 신민회 등 국내활동이 어려워지자 만주 유하현 삼원보 추가장(柳河縣 三源堡 鄒家莊)에 정착한 선생은 1912년에 이주 동포들을 위한 자치기구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 신흥무관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기여하였다.

또한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24년 4월 류자명·이을규·백정기 등과 함께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 「정의공보」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1928년 7월 남경에서 한·중·일·필리핀·대만·안남 등 각국 아나키스트들이 모인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결성식장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과 무정부주의운동」이라는 메시지를 보내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였으며, 1931년 정해리?김광주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과 관계를 맺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독립운동 세력 규합과 주만 일군사령관 암살 등을 목적으로 대련(大連)행 기선을 타고 만주로 가던 중 일경에 체포돼 모진 고문으로 옥중에서 순국하셨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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