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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방관자 였다!
작성일 2005-11-23작성자 김정식조회수 4,273
한반도 내 조국 금수강산 그리고 사랑하는 내 가족과 이웃을 위한다는 단순한 생각이 바로 흔히 말하는 애국심의 발로인 것이다. 그러한 의식은 분단된 조국에서 국민모두가 전쟁의 참상을 겪었기에 은연중에 느껴왔고, 그 시대를 살아온 우리 세대는 당연히 반공의식을 피부로 느끼면서 한 시대를 살아온 것이다. 남북은 휴전협정 이후, 소강상태에서 국가건설에 매진한 듯 했으나 상호간에 체재와 이념적 갈등은 결국 깊은 불신감이 극과 극을 치달았고, 마침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군사적인 실력행사를 펼쳐 왔으며 유엔군 감시하에 군사정전협정 위반을 감춰가며 남북은 소리 없이 음지에서 정보전쟁을 펼쳐 왔다. 60년대부터 72년까지(남북7.4공동성명 발표시점) 뒤이어 특수 전에 대비한 부대단위로 양성된 요원 등. 수많은 민간인과 현역들을 비정상적 방법으로 채용해서 정보전쟁의 희생물로 소멸시켰다. 더 나아가 특수 전에 대비해 가혹한 방법을 동원해 인간으로서 느껴야 할 인성까지 바꿔가며 공작원들을 양성해 왔던 사실은 바로 특별법제정의 원인이 되었기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당연한 것이다. 이들 중 생존자들이 주축이 되어, 과거 국가가 저지른 행위를 규탄하면서 현시대에 걸맞게 지난날 국가 조직에서 빼았은 명예를 회복시켜라며, 97년부터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당국은 영원히 숨기고 싶은 치욕적인 사실이었기에 그토록 감추기에 급급 했었다. 공작원들의 개인적 사연은 한결같이 같은 처지에서 비롯된 사안이라, 누누이 사연을 듣지 않았어도 동병상련의 처지로서 당시 사형수와 같은 절박함과 목숨을 담보한 긴박한 상황을 겪으면서 다른 한편에 깊게 깔려있는 애국심, 이를 접어 두고도 참으로 순진하고 때묻지 않은 인간미를 갖고 있던 철부지들이 였음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사선을 넘으며 살고 죽는 것이 한 순간에 이뤄지는 비참함을 스스로 느끼고 있던 공작원들은, 삶에 대한 집착이 처절할 만큼 강해 구사일생 돌아와도 또 다시 사지로 기약 없이 가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이들 중 상당수가 적지에 투입된 즉시 투항한 사실도 확인했었다. 투항한 자는 적의 대남방송을 통해 침투하던 동기생들께 자수하라는 권고도 적지로 들어 가면서 선전방송을 통해서 알고 있다. 당시 공작원은 인격체로 대하기 보다 예하부대의 소모품으로 간주될 만큼 죽으면 행방불명처리를 해왔고, 성공해서 돌아오면 갖은 방법으로 현혹시켜 평균 3회 이상은 재 공작에 투입해 요행이 생환되어 귀환해 오면 예하부대에선 또다시 재 투입을 시도 하였다. 반복해서 투입된 자 중,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북으로 투항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행위가 용납 될 수는 없으나, 살기 위한 방편에서 임을 애써 이해 하려 하는 것이다. 이제 북에 있는 이들이 원한다면 정부가 송환을 위해 노력을 해야 될 때다. 투항한 그는 사회 친구이다. 친구2명과 동시에 물색조에 의해 공작원으로 채용된(목장1기) 것이다. 3명이 채용된 후에 기구한 운명이 되었다. <전사1명. 부상1명. 투항1명> 당시 교전을 벌이다 2발의 관통상을 입고 천운으로 탈출해온 나는 누구보다 그들을 사회친구 이전에 인간적으로 이해를 한다. 납치임무수행 중 적병13명을 사살하고 추격병과 교전 중에 왼팔과 복부에 총상을 입은 처지로 전신을 붉은 피로 물들여 가을 햇살에 말라서 빳빳해진 적군복장의 군복은 거추장 스럽기만 했고, 왼팔 알통부위 동맥이 끊겨 과다출혈로 눈앞이 시야가 잘 보이진 않고 사방으로 깔린 적의 수색망을 뚫고 한발짝이라도 아군쪽 태극기가 휘날리는 방향을 향해 몸부림치며 살기위한 처절한 모습을 지금생각하면 마치 뒤집혀진 거북이와 흡사 했으리라, 긴박한 상황에 소지하고 있던 압박붕대로 응급처치를 했으나, 탈출에 소요된 10여시간동안 지혈했던 관계로 신경조직이 망가져 흘러간 세월만큼 그 후유증을 참아내며, 개인적으로 점철이 얼룩진 지난 과거는 너무많은 삶에 대한 가치기준을 상실했기에, 죽은 자들을 위하는 마음은 살아난 자가 해야 될 책무이라 오늘도 명예를 향하는 신념만은 결코 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왼팔은 신경마비로 지금 이 글 역시 한 손가락을 사용해 독수리 타법으로 어렵게 쓰고 있는 심중은, 당시 적병들에게 포위된 채 많은 출혈로 의식이 혼미해지는 절박한 상황을 겪으며 오전8시부터 오후 해질 무렵까지 완전 노출된 채로 상황개시 10여 시간을 탈출 중 집중사격을 받아 남북 쌍방이 전쟁상황까지 전개될 만큼 철책선 부근엔 수십 대의 탱크와 장갑차 수백 명의 아군들 2군단장이 상황을 진두지휘 차 나와있던 긴박한 전쟁상태였다. 나는 한 손에 수류탄 안전핀을 제거한 채, 지뢰매설지역 한복판에서 퇴로가 차단 당하고 추격 병을 피해 천행으로 살아나온 것은 인명은제천이란 말에 공감하며, 당시 북한군은 지원 나온 부대원들의 구출로 인해 내가 구조된 사실을 확인하고 부대 짚프차에 실려 철책선 밖을 향해 황급히 질주하던 짚프차 후미에 포를 두발을 발사해 그때 한발만 더 쏘면 아군도 반격을 준비했었음을 군병원 입원중에 전해 들었다. 당시 만1년 동안 강력하게 훈련받은 체력과 강한 정신력이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오늘에 와서 당시 지휘관들에게 왜 자꾸 보냈는가? 물으면 경험자가 성공확률이 높아 공작지휘관인 자신들의 공적과 지구대, 지상대가 평가 받기 때문에 당시엔 어쩔 수가 없었다고 실토하고 있다. 실 예로 63명의 동기생들이 현재까지 나타난 생존 인원은 17명 뿐인 것은 얼마나 많은 공작원들의 희생이 뒤따랐는지 알 수 있는 사안이다. 반면에 사회로 대책 없이 불시에 해고된 공작원들은 수사기관의 반복된 강제연행에 노이로제에 걸려서 쉽지 않은 사회적응에 힘든 날을 보냈고 불법적인 연행 이유는 특수부대출신이기 때문이었다. 보통 새벽3~5시 사이에 이뤄졌으며 공작원 한 명을 연행하는데 12명의 형사들이 동원되는 웃지 못할 사건들이 70년대 초반에 다반사로 이뤄졌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은 특정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해고된 공작원 모두에게 그 같은 역겨운 사건들이 강력사건만 발생되면 무조건 연행해서 수사기관에서 10일 이상씩 붙잡아 놓고 물고문 전기고문 고추 가루고문 불 고문 특히 잠을 재우지 않아서 헛소리를 해야 되는 악행을 몇 번만 당하거나 군에서나 사회서나 어떠한 잘못이 없음에도 자꾸만 끌려 다니다 보면 이 나라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기분을 참을 수 없어서 스스로 자살을 택한 요원들이 상당수가 있다. 자살한 요원들은 젊은 나이에 연고자가 없어서 이제 명예회복의 틀에서 단 한푼의 보상을 받을 수 없는 원통하고 통분해야 할 원혼들이 불쌍하고 비통한 마음이다. 이 같은 점은 당시 특수공작 팀 5명이 모두 살아서 해고됐으나, 이들 중에 3명은 사회적응에 불이익을 빈번하게 받아 자살을 택한 것은 얼마만큼 왕따를 당했는지 무언의 입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함께 작전에 투입되어 공적을 세운 요원을 72년초 사회에서 만나 그가 서울 난곡 동에서 누추하게 살던 그곳에 코 흘리게 3살 꼬마를 봤던 기억이 있으나, 이 무렵 가장인 그가 국가와 사회를 향해 목이 터져라 비방하면서, 다리 아래로 투신 자살해 가정은 즉시 파탄 났고, 고아로 어렵게 자란 불쌍한 공작원 딸에 대한 소재를 3년 전 수소문 끝에 알고 있으나 지금은 결혼해서 잘살고 있으니, 국가가 억 만금을 준다 해도 보상금을 안받겠다며 제발 시댁에 알리지 말아달라는 애절한 사연을 듣게 되었다. 이 나라에 양식 있는 자들은 남의 탓이려니 방관했었고, 국가에 충성한 죄가 원인되어 후대에 까지 참담한 비극을 물려 주었다. 그때 죽지 못한 모진 생명력들이 아직도 살아 있기에 그 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살아있는 자들이 생전에 위국헌신한 전우들의 희생정신을 후세대에 길이 선양하고 나라사랑의 근본 틀을 공고히 다지고자 하는 것이다. <계속> 대한민국 첩보요원 전우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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